한명숙 전 총리에게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건넸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던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해 그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핵심 진술이 무너져, 이번 수사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5만달러 사건과는 다를 것"이라고 했던 검찰의 자신감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공산이 커졌다. 만일 그렇게 될 경우, 당초 이번 사건이 '무리한 별건(別件) 수사'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진행됐던 점을 감안하면 검찰 지휘부에 대한 책임론까지 불거질 전망이다.
20일 이 사건 두 번째 공판에서 한씨는 처음부터 검찰에서의 진술을 번복하기로 작심한 듯 보였다.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전달한 사실을 기억하냐는 검찰의 질문에 그는 "이건 일어나서 말씀 드리겠다"고 운을 뗀 뒤,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제보자가 서울시장 (선거)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힘들어질 것'이라고 겁박해 허위 진술했다", "한 전 총리는 비겁하고 조악한 저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있다", "한 전 총리와 연관돼 사건이 광범위해지면 회사를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스토리를 지어냈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모두 자신이 꾸며낸 '소설'이라는 얘기다.
법정은 크게 술렁였고, 당황한 검찰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애초 준비한 질문을 이어갔지만, 한씨는 매번 "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했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한 전 총리는 눈물을 훔쳤고, 함께 기소된 보좌관 김모(여)씨는 예상 외의 전개에 놀란 듯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다.
이 같은 한씨의 진술은 이번 사건의 뼈대를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물론, 뇌물이나 정치자금 사건에서 금품을 주고받은 양쪽 당사자가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계좌추적 내용 같은 명확한 물증이 없을 땐 공여자의 일관된 진술이 가장 중요한 토대를 이룬다. 수사 당시 검찰도 "한씨의 진술이 매우 일관된다"고 했다. 핵심 진술이 뒤집힌 이상, 다른 정황증거들의 신빙성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검찰로선 더 이상 공소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관측까지 내놓고 있다.
검찰은 갑작스런 진술번복 경위를 추궁했지만 한씨는 "검찰 수사과정보다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야 한 전 총리의 누명이 벗겨질 것으로 생각했다"며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는 이 순간이 오기만을 고대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씨는 "허위 진술의 결과로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에서 낙선하고 기소까지 됐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검찰로선 이래저래 난처한 처지를 면할 수 없게 됐다. 당초 한 전 총리의 5만달러 사건 1심 무죄가 예상되자 선고 하루 전, 이 사건 수사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무죄 판결의 여파를 희석시키려고 결론에 짜맞춘 표적ㆍ기획수사를 했다"는 비판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한씨는 그러나 이날 "검찰의 강압수사는 없었다"고 말했다. '정치보복성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검찰을 '속였다'는 말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한씨 말이 사실이라면, 검찰에 특별한 의도가 없었다 해도 결국엔 최고의 수사력을 자랑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고작 제보자와 한씨한테 농락당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한씨의 법정진술은 다른 객관적인 정황들과 맞지 않아 금세 거짓인 게 드러날 것"이라며 "회사장부와 비밀장부, 제3자의 진술 등 객관적 증거들이 많아 공소유지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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