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한 살 때 동네에 개병(광견병)이 돌았다. 우리 집 개도 개병이 들었는데 제일 먼저 제 어미를 물고 제 아가리로 물 수 있는 것은 다 물었다… 나중에 삐쩍 마른 채 집으로 돌아온 그 개를 사람들이 죽이고 뒷산에 묻었다. 다음날 어른들이 개를 파내 잡아 먹었다… 다시 그 개병이 돌고 있다.”
화면이 채 열리기도 전 시작되는 중국 옌볜 택시운전사 김구남(하정우)의 담담한 독백부터가 소슬하다. 올해 충무로 최고 기대작 ‘황해’는 광견병 걸린 개처럼 등장인물들이 미쳐 날뛸 것임을 예고하며 막을 연다.
묵시록과도 같은 구남의 독백은 ‘황해’의 156분을 오롯이 관통한다. 스크린은 시종 흑백에 가까운 컬러이며 두드러지는 색감은 오직 피다. ‘택시운전수’ ‘살인자’ ‘조선족’ ‘황해’ 등 4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내내 냉기를 뿜는다. 아내를 한국에 보내려고 사채를 끌어 쓰고 빚을 갚기 위해 마작에까지 손을 댄 구남의 잿빛 현실, 개장수 면정학(김윤석)의 꾐에 빠져 청부살인을 하러 황해를 건넌 구남, 살인을 하지도 못하고 누명을 쓴 채 도망자 신세가 된 구남, 구남을 죽이고 증거를 인멸하려는 면정학의 추격, 면정학을 고용한 남한의 거부 김태원(조성하)의 사연 등이 피칠갑 액션 속에 이어진다.
구남의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개 구(狗)’에 ‘사내 남(男)’을 염두에 둔 작명으로 보인다. 구남의 한국에서의 처절한 행각은 개와 다를 바 없다. 자기의사와는 무관하게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그는 이성을 차릴 새도 없이 미친 듯이 주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결국 삐쩍 마른 형색으로 돌아다닌다. 영화는 그렇게 돈에 미쳐버린 세상과 코리안 드림의 허상을 비판한다.
구남의 집에 놓인 결혼식 사진 액자와 아내의 서울 집(집이라기보다 쪽방이다)에서 구남이 발견하는 딸 사진이 담긴 액자는 비극적인 현실을 압축해낸다. 유리가 깨진 두 사진 액자는 코리안 드림으로 파탄이 난 옌볜 사회의 자화상이다. 아마도 ‘황해’라는 제목은 바다를 건너서도 끊기지 않는 먹이사슬에 대한 은유인 듯하다.
이 영화는 ‘추격자’의 세 남자가 재결합한 것만으로도 화제를 뿌렸다. 나홍진 감독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연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연기파 배우 하정우, 김윤석의 조합은 다시 한번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구남이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강남 골목의 추격 장면, 거대한 트레일러가 좌충우돌 끝에 몸을 뒤집는 부산 부두 장면은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사실감이 넘친다. 냉혈한 면정학이 살인본색을 드러내는 장면 등에서도 숨이 턱턱 막힌다. 특히 차량 추격 장면은 충무로 역사상 최고다. 100억원을 들여 11개월이나 촬영한 대작의 기운이 스크린에 묻어난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쉴새 없이 심장을 조이는 연출에 지루한 틈이 없다. 잔혹한 액션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비해 차고 넘쳐 눈살이 찌푸려진다. ‘추격자’의 망치를 대신해 난무하는 도끼질에 간담이 서늘하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드는 겨울, 이 영화를 선뜻 권할 수 없는 이유다. 22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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