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인수전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채권단이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박탈하고 현대차그룹과 인수협상을 개시하겠다고 밝히면서,'현대상선 경영권 보장 중재'라는 카드를 내민 것.
양쪽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큰 무리 없이 인수전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란 게 채권단 판단이다. 현대그룹이나 현대차그룹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인수전이 시작되기 전부터도 이 같은 중재안이 거론됐던 점을 감안하면 실현가능성이 꼭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채권단 내부 정서다.
중재안이란
현대그룹의 주력기업인 현대상선 지분분포를 보면 현정은 회장을 비롯한 현대그룹측(40.76%)과, 현대중공업 KCC 등 범현대가(33.85%)가 양분하고 있는 상황. 현대건설이 보유한 지분 8.3%가 일종의 '캐스팅보트'가 되는 구도다.
그런데 현대그룹은 현재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한 순환출자구조여서, 현대상선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 현대그룹 전체의 주인이 바뀔 수 있다. 때문에 현대건설의 지분향배는 결국 현대상선을 넘어, 그룹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만약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상선 지분이 49.06%로 높아져 경영권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반대로 현대건설이 현대차그룹에 넘어가면 범현대가의 지분이 42.15%가 돼, 추가지분 매입여하에 따라 현대그룹 전체를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애초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에 그토록 '올인'했던 이유도 '그룹 경영권 사수'에 있었다는 게 재계의 정설이다.
채권단의 '경영권 보호중재'는 바로 이 부분을 겨냥한 것. 즉 향후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승계하게 될 협상을 통해 현대차그룹에 현대건설을 넘기되, 현대상선 지분 8.3%는 국민연금과 같은 중립적 제3자에게 다시 매각토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상선은 현재의 지분분포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현정은 회장측이 지금처럼 경영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는 만큼, 현대그룹 입장에서 최선(현대건설인수)은 아니더라도 차선(경영권보호)은 될 수 있다는 게 채권단 판단이다.
이 같은 중재안은 현재 채권단 일원인 정책금융공사가 주도하고 있어, 정부의중이 담긴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향후 현대그룹의 치열한 법적 공세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이란 평가도 나오고 있다. 정책금융공사 관계자는 "중재안이 받아들여지면 27일경에 주주협의회 의결을 거쳐 현대차와 매각협상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그룹 입장
채권단의 중재제안에 따라 공은 현대그룹으로 넘어간 상태. 하지만 현대그룹은 "검토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현대그룹은 무엇보다도 채권단 제안이 현대건설을 현대차에 넘긴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 반발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한 채권단 조치가 불법적이고 부당한 만큼 소송을 통해 바로잡겠다는 태세인데, 이런 상황에서 채권단이 오히려 현대차로 넘기는 것을 기정사실로 한 중재안을 내놓은 것에 격분하는 분위기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건설을 현대차에 줄 테니 너희는 현대상선 지분이나 가져가라는 말 아니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채권단 제안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불만거리다. 현대그룹에 따르면 채권단은 이미 인수전에 앞서 한 차례 현대건설 보유 현대상선지분의 분리 매각을 검토했지만 이 경우 현대건설의 전체 매각단가가 낮아져 배임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구상을 접었다는 것.
현대그룹은 현대차 역시 채권단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결국 이번 제안은 채권단이 법정 공방으로 인한 매각작업의 장기 표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내놓은 비현실적'사탕발림'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그룹의 상황 인식이다.
현대차 그룹 입장
현대차측은 채권단의 중재안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검토할 상황이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공식적으로는 우선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입장. 현대상선 지분 처리는 차후에 고민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현대그룹의 줄 소송으로 인수 작업이 무산되거나 장기 표류하는 것보다는 채권단의 중재안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현대차가 이 문제를 풀려면, 범 현대가 차원의 조율이 필요할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현대상선 지분 자체가 현대중공업 KCC 등 범 현대가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고, 특히 범 현대가에서 현정은 회장과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와 직결된 사안인 만큼, 쉽게 결정할 사안도, 현대차가 단독으로 결론을 내릴 사안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범 현대가와 관련 관측은 일부의 추측일 뿐"이라면서도 "채권단의 중재안은 우리 스스로 판단해 결정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박진석기자 jseok@hk.co.kr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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