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반도체는 전자산업의 쌀"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신화가 익어가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자주 들었지만 지금 들으면 꽤나 어색하다. 반도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져서 새삼 강조할 이유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묽어진 때문이다. 체감물가가 여름철 야채 파동 이후로도 꾸준히 상승하는 반면 쌀값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농업인구는 줄어도 쌀 생산은 그대로고, 쌀 소비는 줄어드는 불균형 구조가 정착되는 마당이니 쌀이 특별히 소중할 이유가 없다.
■ 지난해 국민 1인 쌀 소비량은 74㎏까지 떨어졌다. 70년 136.4㎏, 90년 119.6㎏, 2000년 93.6㎏과의 큰 차이로 보아 일본의 54㎏ 수준까지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쌀 소비를 늘리려는 다양한 방안이 거론되고, 막걸리나 떡볶이의 인기가 보탬이 되었지만 아직 미미하다. 쌀 빵이나 쌀 피자, 쌀 과자 등 밀가루를 쌀가루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그나마 장기적으로 의미를 가질 만하다. 다만 이런 쌀 가공식품 대부분이 값싼 수입 쌀을 쓰는 데다 쌀 가루 함량이 높지 않아 쌀 수급 문제 해결에 직접 기여하기 어렵다.
■ 그제 경기 안성시 보개면에 제법 큼직한 쌀국수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안성쌀만 쓰고, 쌀가루 함량을 85~90%까지 끌어올린 생면을 삶아낸다는 점에서 본격 쌀국수 1호점이라 할 만하다. 시중에 판매되는 쌀국수는 대부분 건면이고, 더러 나와 있는 생면도 쌀가루 함량이 30%도 안 된다. 칼국수를 즐기는 사람들의 입맛이 생면에 집착하는 반면, 고함량 쌀가루로 점성과 연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생면을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쌀에는 밀과 달리 글루텐이 들어 있지 않아서다. 이런 난점을 극복한 것은 '안성 쌀국수'가 국내 최초인 셈이다.
■ '안성 쌀국수'는 구수하고 시원하기가 기존의 칼국수보다도 낫다고 한다. 베트남 쌀국수의 건조한 맛과 달리 도쿄특파원 시절 해장용으로 즐겼던 윈난(雲南) 쌀국수의 깊고 시원한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생면과 고기 국물이 빚어낼 맛이 짐작이 간다. 이런 '진짜 쌀국수'가 인기를 끌고 전국 곳곳으로 퍼져 쌀 소비량을 늘리길 기대한다. 쌀 500가마를 허비한 끝에 개발에 성공한 L씨의 열의가 빛난다. 지역 미작 농가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겠다고 열심히 그의 등을 떠민 시의원 S씨는 지방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과 다름없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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