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19세대인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최근 낸 평론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어느새 노년에 가까워진 내 나이가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 살아오는 동안 전통적 농경사회가 현대적 산업사회로 변하는 과정을 낱낱이 목격한 것이 우리 세대인데,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닥쳐 당황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책에 실린 이런 종류의 평론문장이 언제까지 사회적 존속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국내 대표적 리얼리즘 문학평론가가 무려 668쪽에 달하는 진중하고도 섬세한 평문을 묶은 책을 내면서 "이런 종류의 평론문장이 언제까지" 살아남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쓴 글을 읽으며 다소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세대는 70여년 한국 현대사의 변화를 "낱낱이" 목격했다고 자신하는 세대다. 그 세대가, 자신들이 일궈온 '문장'이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른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뉴스위크 인터넷판은 며칠 전 '인터넷이 죽인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10년 사이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미국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 14가지를 꼽았다. 프라이버시, 사실, 예의, 집중력, 편지 쓰기, 9 to 5, 휴가, CD, 전화번호부,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필름, 비디오 대여점, 졸업앨범, 백과사전, 스트립쇼.
흥미로운 기사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아날로그 시대의 소산인 음악CD, 폴라로이드, 비디오는 디지털 음원과 카메라, 그리고 온라인에서 쉽게 다운받을 수 있는 합법ㆍ불법 영화로 대치된 지 오래다. 요즘 세상에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졸업앨범마저 페이스북 등을 활용해 온라인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스트립쇼야 온라인에 널린 게 그런 동영상인데 사라질 만도 하다.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이 사라진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요즘 중고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종이 사전 대신 아예 전자사전을 지참하라고 한다. 과거에 선배들이 사전 씹어먹으며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할까. 편지 쓰기는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대신한다. 활자를 읽는 대신 디지털 화면으로 공부하고 생활하는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터넷에서 이미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없다. 예의는 당연히 사라진다. 9 to 5 정시 출퇴근이나 휴가도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한 세상이 되면서 그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실. 사실보다 허위와 주장이 넘쳐나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엄정한 사실을 찾는 것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먹거리를 골라내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졌다.
염무웅의 글을 읽으면서 뉴스위크의 14가지에 '문장'이라는 것을 더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지금 시대에 "내 책이 그렇게 많은 독자에게 읽히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많지 않은 독자에게일망정 나는 내 글이 정독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문장과 정독은 사라지고 있는 중일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우리사회의 '온정'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비리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온정에도, 그것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됐다. 한국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1928년 설치 이후 82년 만에 처음으로 올해 연말 성금 모금 목표액 달성 여부를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21세기의 첫 10년이 사라지고 있는 것들로 안타깝게 저물고 있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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