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범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낭을 꾸린다. 창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당신은 소풍을 떠나려 한다. 배낭 안에 바나나 따위는 없다. 동물원으로 가는 길, 위로 비구름 지나간다. 당신은 배낭을 메고 소풍을 간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소풍. 이 길이 끝나면 비 그치려나. 신발 안의 빗물이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 당신은
나침반을 꺼낸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은 비를 맞으며 동물원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펭귄을 만나리라.
동물원의 펭귄, 물 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비에 젖은 당신,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느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묻는다. 펭귄은, 극점에 담겨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두 눈 가득 남극을 담고
● 대공원을 탈출한 말레이곰 꼬마는, 청계산 맑은 밤 물소리 곁에 두고 자신 닮은 큰곰 작은곰 별자리 보며 자유만 생각할까 아니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그리워할까. 물론 곰은 잡혀야겠죠. 그런데 사람들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곰이 무사히 지리산까지 가, 방사된 반달곰들과 합류했으면 하는 맘도 드네요. 곰이 사람 냄새, 쇠 냄새로부터 무조건 먼 곳을 나침반 삼아 움직일 것 같아, 미안한 맘에 해보는 생각이죠.
펭귄이 물 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표현 좋죠.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실제 모습에서도 나침반을 연상할 수 있고, 고향인 남극을 그리워할 펭귄 맘 헤아려보아도, 자침 떨다가도 끝내 극점을 향하는 나침반과의 비유는 정말 그럴 듯하지요.
시인은 시적 화자를 통해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물으면서 자신에게,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있어 나침반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준엄한 질문을 던지네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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