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모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감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자, 시민들 혹은 해커들은 그 시스템을 역으로 이용해 국가의 비밀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출신 저명 기호학자이자 소설 저자 움베르토 에코가 최근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 기고에서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미 국무부 비밀전문 공개의 역사적 의미를 이같이 규정했다. 국가에서 시민으로의 '일방적 감시 흐름'이 정보화 기술 발전에 따라 시민도 국가를 감시하고 비밀을 찾아낼 수 있는 '순환적 흐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비밀전문 폭로 이후 지금까지 유지돼온 국가ㆍ시민ㆍ언론 사이의 균형은 근본부터 뒤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회복 어려운 상처 입은 국가권력
이 같은 '감시의 순환구조'형성은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세기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진짜 비밀은 텅 빈(empty) 비밀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텅 빈 비밀은 비밀의 가치가 유지되려면 결코 누설돼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국가권력은 진짜 비밀 즉 텅 빈 비밀을 유지해야 지켜지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번에 이 같은 텅 빈 비밀이 누설됐다는 점에서 권력이 흩어져 버리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같은 기밀을 폭로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에 해당하느냐는 논란이 일고 있지만 미 정부에 더 큰 문제는 '과연 앞으로 국가의 비밀 지키기가 가능할 것인가'이다. 과거에도 국가의 비밀이 폭로된 사례가 많지만 이번처럼 손쉽게, 대규모로 유출된 적은 없다. 국무부 비밀전문 최초 누설자인 브래들리 매닝 일병은 무려 25만건이 넘는 비밀전문을 빼돌리는데 여성가수'레이디 가가'의 음악CD를 이용했다. 이런 정보는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망을 통해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진다.
미 정부는 뒤늦게 정부 컴퓨터의 CD와 DVD기기를 폐쇄하고 데이터 다운로드 용량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 보안책을 내놓고 있으나, 이런 조치로 정보유출 재발을 근절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흐려진 언론 자유와 국익침해의 경계
대규모 비밀 유출에 경악한 미 정치권은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 의회에서는 위키리크스와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를 간첩죄로 기소하라는 주장이 비등하다.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라는 얘기도 나온다. 심지어 조지프 리버만(코네티컷) 상원의원은 위키리크스의 폭로내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도 간첩죄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 행정부도 단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려우나 세계의 여론은 나뉘어
있다.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차원에서, 또는 미국을 비난해야 할 정치적 이유에서 위키리크스와 어산지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다만 폭로를 주도한 위키리크스와 특히 이를 보도한 세계 주요 언론들은 이번엔 확신에 차 있다기 보다는 언론자유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폭로가 있기 전에 위키리크스와 제도권 언론은 공동의 검토를 거쳐 공개 여부를 합의했으며, 누출될 경우 신변이 위험해질 당사자의 이름은 제외하는 등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는 미 국무부가 위키리크스를 신문ㆍ방송 등 전통적 미디어와 분리해 처벌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이번 위키리크스 사건은 비밀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국가는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 또 그런 가운데 언론의 자유는 어디까지 경계를 허물어 갈 것인가 하는 쉽지 않은 문제를 던졌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 '펜타곤 페이퍼' 사건 공익에 부합해 무죄 선고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NYT)가 연재 보도하기 시작한 미 국방부의 베트남전 1급 기밀 보고서(이하 '펜타곤 페이퍼')는 역사를 바꿨다. 미 국방부가 1964년 베트남전 확전을 위해, 미 함정이 북베트남에게 공격당한 것처럼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사실 등이 드러나면서, 반전운동이 거세졌고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두 얼굴을 드러낸 것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국가 기밀과 언론자유가 치열하게 대립하다 결국 언론자유가 승리했던 대표적 사례로도 회자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한 NYT, NYT 기자에게 보고서를 넘겨준 전직 해군 장교 대니얼 엘스버그(79ㆍ사진)는 최종 무죄를 선고 받았다. NYT는 간첩죄로, 엘스버그는 간첩ㆍ절도죄 등 12개 중범죄로 기소됐으나 연방대법원에서 "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정부의 비밀을 파헤쳐 국민에게 알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기관의 비리나 비행을 폭로한 행위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NYT가 3회까지 연재했을 때 연방 1심 법원은 미 법무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밀 공표를 금지하라고 임시 명령해 15일간 연재가 금지된 적도 있다. NYT는 뒤이어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보도하기 시작한 워싱턴포스트와 연합, 대법원으로 끌고 갔고 임시 게재금지 결정도 취소됐다.
펜타곤 페이퍼 사건은 법률적 측면에서 위키리크스 사건과 대체로 유사하다고 할만하다. 때문에 기밀 폭로를 감행한 위키리크스나 뉴욕타임스 등을 기소해도 무죄일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다만 앞서의 대법원 판결이 "정부기관의 비리나 비행의 폭로"를 명시했는데 이번에 폭로된 기밀이 이에 해당하는 지는 따져볼 구석이 있다.
미군 신분으로 최초로 기밀을 빼내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브래들리 매닝(23) 일병의 경우는 엘스버그와는 확연히 다른다. 엘스버그는 기밀 내용을 보고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된다고 '확신한'반면, 매닝은 기밀 자체에 초점을 맞춰 내용을 가리지 않고 넘긴 점이 다르다. 펜타곤 페이퍼는 7,000쪽으로 위키리크스의 25만여건에 못 미쳤지만 그 내용은 훨씬 충격적이었고, 한때 베트남전을 지지하고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엘스버그를 반전주의자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물론 폭로된 위키리크스 문서는 아직 1,300여건에 불과해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이른 감이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의 신화'로서 아직도 존경받는 엘스버그와 무책임한 기밀 유출자로 낙인 찍힌 매닝은 두 사건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의 미래는
스스로 영국 경찰을 찾아와 체포(7일)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39)에 대해 영국 사법당국이 14일(현지시간) 스웨덴 송환 여부를 논의하는 심리를 연다. 어산지의 신병이 이날 결정에 따라 스웨덴으로 넘어갈 경우, 어산지의 우려대로 간첩죄 적용이 예상되는 미국으로 사건 자체가 이송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장 어산지는 14일 심리에 앞서 보석을 재차 신청할 예정이지만 현재로서 풀려 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5일엔 어산지가 법원에 출두해 재판을 받는다.
이 가운데 13일 어산지가 체포직전 녹화한 영상 다큐멘터리가 새로 공개됐다. 스웨덴 공영 TV를 통해 방송된 사전 인터뷰에서 어산지는 "미 국방부와의 특별한 출판 투쟁에 관여했던 망명출판인의 한 사람으로 스웨덴에 왔으며, 이런 나를 미국이 간첩혐의로 기소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스웨덴과 미국이 미리 설치한 덫에 자신이 걸려들었으며, 영국의 스웨덴 송환 결정이 내려진다면 미국에서 처벌 받는 상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자체 전망과 다름없다. 어산지는 "스웨덴 사법 시스템이 남용된 데 대해 실망스럽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이 어산지의 신병을 인도받더라도 처벌까지 이어지리란 장담은 힘들다. 미 정가에서 간첩죄 적용을 놓고 논란이 심화하고 있어서다. 12일 미 의회전문지 더 힐에 따르면 미 하원은 16일 법사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에릭 홀더 법무장관을 상대로 위키리크스 사건에 관한 청문회를 연다. 존 코니어스 하원 법사위원장은 "1차 대전 시절의 간첩죄 적용이 타당한지 헌법적 문제를 조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정보당국 등의 견제로 제대로 서비스되지 못하는 위키리크스 사이트도 설립자처럼 바람 앞의 등불인 처지다. 1,000여 개가 넘는 미러 사이트가 만들어졌지만, 원래 사이트는 계속 서버를 옮기며 숨바꼭질을 이어간다. 어산지와의 견해 차이로 위키리크스를 떠났던 직원들이 13일부터 서비스에 들어가는 '오픈리크스(Openleaks.org)'도 위키리크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주목된다. CNN은 "오픈리크스는 위키리크스와 달리 무작정 폭로보다 내부고발자를 언론에 연결시키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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