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에도 한국 문화의 현장은 치열했다. ‘정의’는 출판계를 넘어 사회 전체의 화두가 됐고, ‘슈퍼스타’는 한국인들에게 잊어버린 꿈을 다시 꾸게 했으며, 로댕과 샤갈은 지친 우리를 위무했다. 오늘부터 10여회에 걸쳐 2010년 문화계를 분야별로 결산한다.
문학
2010년 문학계의 특징적 현상 중 하나는 장편소설 창작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올해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심사에서 검토된 작품 중 장편소설이 94편으로 지난해(37편)보다 2.5배나 늘어난 데 비해, 중단편소설은 199편으로 지난해 287편보다 30% 이상 감소했다. 인터넷 매체를 통한 장편소설 연재가 본격화되면서 작가들이 중단편보다는 대거 장편 집필에 나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들의 콘텐츠 확보를 위한 수요 급증에 따라, 혹은 연재가 용이하다는 작가들의 편의에 따라 양산되는 장편소설의 작품성에 대에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올 한 해 한국문학에서 눈여겨볼 현상과 징후를 인물 중심으로 살펴봤다.
조정래 _ ‘사회파 소설’의 귀환
조정래(67)씨의 장편소설 은 돈을 무기로 권력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가는 재벌의 행태를 다루고 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가 폭로한 대기업의 비리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지난 10월 출간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머물며 지금까지 18만여부가 판매됐다. 조씨는 “작가에게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해 폭로하면서 ‘시대의 산소’ 역할을 해야 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조씨 외에 여러 작가들이 올해도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실을 정면에서 다루는 소설을 발표했다. 중진 중에서는 황석영(67)씨가 강남 형성사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을 만들어낸 역사적 배경을 짚은 장편소설 을 발표했고, 주원규 김이설 김사과씨 등 30대 젊은 소설가들도 사회비판 의식을 앞세운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올해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황정은씨의 경장편소설 는 사회 모순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정치성을 새로운 소설미학으로 구현해낸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문학평론가 복도훈씨는 “작가들이 용산참사, 4대강 개발 등을 접하면서 개발 위주의 비인간적 근대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이들 ‘사회파 소설’의 부흥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그 자체로 극적인 사회 현실과 역사에 압도돼 문학적 형상화에 실패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예컨대 에 대해서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평면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문학평론가 고인환), 에 대해서는 “창작보다는 자료의 재구성에 치중한 조립소설에 가깝다”(문학평론가 이명원)는 등 호평만큼이나 매서운 비판도 잇따랐다.
이구용 _ 활기 띠는 한국문학 수출
이구용(45) 임프리마코리아 상무이사는 한국문학의 번역 판권 수출에 독보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출판 에이전트다. 2005년 김영하씨의 장편소설 의 영문 판권을 미국 유명 출판사인 하코트에 판 것을 시작으로, 이씨가 5년 동안 거둔 결실은 괄목할 만하다. 신경숙씨의 장편소설 는 국내 출간 2년 만에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일본, 러시아 등 20개 국에 판권이 팔렸고, 조경란씨의 장편소설 는 9개 국에 수출됐다. 김영하씨의 두 번째 미국 진출작 은 지난 9월 말 출간 직후 세계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 등 몇몇 기관의 시혜적 지원에 주로 기대 해외에 소개되던 한국문학은 이씨를 통해 세계를 무대로 그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씨는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영문 판권을 판매한 우리 소설 가운데 할리우드 측과 판권 거래를 타진 중인 작품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소설가 권지예 이정명 한강 이기호 편혜영씨, 아동문학가 황선미씨 등과 전속 계약을 맺고 번역 판권 거래를 일임받았다. 그는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쓰는 데 전념하고, 에이전트는 그 작품을 판매하는 데 힘쓰는 것이 최적의 분업”이라며 “영미ㆍ유럽 출판계처럼 한국문학에도 에이전시 제도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시인 정호승 도종환씨, 소설가 김별아씨 등이 최근 한 기획사에 외부 행사 조율을 맡기는 등 변화도 감지된다.
고은 _ 기대와 좌절, 우리 문학의 자기점검
고은(77)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어느 해보다 높다고들 했지만 올해도 예상은 빗나갔다. 고은 시인이 지난 4월 25년 간 써온 노작이자 외국에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연작시집 를 완간한 점, 역대 수상자의 면면을 봤을 때 올해는 비유럽권 시인이 유력할 것이라는 예측이 그 이유였다. 수상자 발표 당일 AP통신이 그를 유력 수상 후보로 꼽아 기대를 한껏 높이기도 했다.
또 한 번의 노벨문학상 소동을 겪은 한국문학에는 다양한 자기 점검의 목소리가 나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4ㆍ19세대를 위시한 한글 전용 세대들이 문학작품을 생산한 것은 50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그 짧은 기간 동안 한국문학이 이룬 눈부신 성과를 온당하게 평가하는 작업부터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치수씨는 “2008년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는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있다가 수상자 발표 보름 전쯤 갑자기 귀국했는데, 아마도 (심사기관인) 스웨덴 아카데미 측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며 “매년 수상자 발표에 초점을 맞추고 불확실한 예측을 쏟아내는 언론 보도 행태도 돌아볼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작품의 가치와 개성을 손상하지 않는 고급 번역 인력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어김없이 나왔다.
이 밖에 최승자 시인이 오랜 심신 쇠약을 딛고 연초에 11년 만의 새 시집 을 펴낸 것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 시집은 지금까지 1만여 부 이상 팔렸고 문단은 대산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수여로 돌아온 시인을 환대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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