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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듣는 미술' 경험해 보세요

입력
2010.12.1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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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어둠 속에서 익숙한, 혹은 낯선 영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내용이나 대사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비연속적 장면들의 연속이다. 각 영화에 담긴 배경음악, 대사, 소음 등이 장면들을 잇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가운데 수천 개의 시계들도 스쳐 지나간다. 법정에 선 주인공이 초조한 듯 들여다보는 손목시계, 현관문을 열어주는 주인공 뒤로 걸린 벽시계 등 화면 속에 담긴 시계들은 제각각 어떤 시간을 가리킨다. 놀랍게도 그 시간은 관람객이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암흑 속에서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보고 있으면 평소 인식하지 못하던 시간의 무게가 가슴을 누른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개되고 있는 미국의 사운드 아티스트 크리스찬 마클레이(55)의 영상 작업 ‘시계’는 총 상영시간이 24시간이다. 지난 10월 런던 화이트큐브갤러리에서 발표된 신작으로 흑백영화부터 액션영화, 멜로영화 등 세계 각국의 영화가 재료로 쓰였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15년 동안 감금돼 있다 풀려나온 최민식이 시계를 보는 장면을 비롯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달콤한 인생’ 등 한국 영화도 있다.

“몇 편의 영화가 작품 속에 들어있냐”는 질문에 마클레이는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마 3,000~5,000편 정도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편집에만 28개월, 구상까지 합치면 5년의 시간이 걸렸다”면서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시간의 흐름을 이미지와 함께 느끼면 된다”고 말했다.

‘시계’를 포함해 영화 편집으로 완성한 영상 작업 3점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의 제목은 ‘소리를 보는 경험’. ‘보는 미술’이 아니라 ‘듣는 미술’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선사하는 전시다. 마클레이는 30여년 간 ‘보는 것을 들을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작업해왔다. LP판을 사용해 소리를 섞는 디제잉 작업이나, 레코드 표지나 악보처럼 소리와 관련된 이미지를 사용한 오브제 작업,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을 소리 중심으로 편집한 영상 작업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4채널 영상 작업인 2002년작 ‘비디오 사중주’는 이번 전시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일렬로 늘어선 4개의 스크린에서는 영화 700여편에서 골라낸 장면들이 상영되는데, 각각의 스크린이 하나의 악기가 된다. 노래 소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뿐 아니라 유리 깨지는 소리, 발 구르는 소리, 비명, 시계 알람, 메트로놈 등 온갖 소리가 교차하며 사중주를 펼친다. 눈을 감고 들으면 마치 현대음악 연주회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1995년작인 ‘전화’는 할리우드 고전 영화 속 통화 장면들을 짜깁기한 작품이다. 전화 다이얼을 돌리고,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고,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기까지 여러 영화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배열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오드리 헵번, 잉그리드 버그만, 마릴린 먼로, 숀 코너리, 줄리 앤드류스, 톰 행크스 등 익숙한 스타들의 얼굴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하지만 마클레이는 “영화가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매체이기에 재료로 선택했을 뿐”이라며 “각각의 영화를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소리에 집중해 전체적인 작품을 봐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궁금증 하나. ‘시계’는 정말 24시간 동안 상영되는 걸까? 아쉽게도 미술관이 문을 닫는 오후 6시 1분부터 오전 10시 29분까지의 장면은 아무도 볼 수 없다.

전시는 내년 2월 13일까지이며 내년 1월 8일, 22일에는 마클레이의 작품세계에 대한 강연회도 열린다. 관람료 3,000원. (02)2014-6901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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