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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희망] <22> 국내 첫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운영하는 이호택·조명숙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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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희망] <22> 국내 첫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운영하는 이호택·조명숙 부부

입력
2010.12.0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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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요? 여기 따뜻한 난로 옆에 앉으세요."

살며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온 낯선 흑인 남성을 보며 이호택(51)씨가 영어로 말한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묻기에 앞서, 쌀쌀한 날씨에 약간은 떨었을 듯한 그 흑인에게 먼저 몸을 녹이라고 한 것이다. 잠시 뒤 이씨가 다시 묻는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혹시 점심 먹지 않았으면 우리와 같이 먹읍시다."

이름도, 직업도, 국적도 모르는 자신에게 함께 점심을 하자는 이씨의 호의를 흑인 남성은 수줍게 웃으며 거절한 뒤 "나는 가나 사람인데 방글라데시 친구의 소개로 찾아왔다"고만 말했다.

조명숙(40)씨가 기자에게 "이 남성처럼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혼자서 찾아오는 외국인이 적지 않다"며 "대부분 낯선 한국 땅에서 생계문제 등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 부근 상가 3층에 들어선 피난처의 사무실에서는 이런 일이 흔해서 이호택, 조명숙씨 부부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도 놀라거나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이한다. 피난처는 1999년 설립한 국내 최초의 난민지원단체인데, 부부는 10여 년에 걸친 난민지원활동의 이야기를 최근 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외국인노동자 돕다가 만난 부부

국제사회에서 난민은 전쟁 또는 박해 등의 위험 때문에 제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통용되는데, 난민이 그 같은 박해가 두려워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보호해달라고 피신한 나라에 요청하는 것을 난민인정신청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법무부가 난민신청 및 인정 업무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걸리는 시간이 평균 1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행정소송을 내면 4,5년이 걸리기도 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자면 제 나라로 돌아갔을 경우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료 수집 및 제출, 통역, 문서 작성 등이 필요한데 피난처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행정소송까지 갈 경우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난민 신청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소송을 낸다. 올해는 131건의 소송을 진행했는데 패소가 훨씬 더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피난처의 활동 가운데 법률적 지원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행히 이호택씨가 법률적 지식이 풍부해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10여 년 동안 사법시험 공부를 했다. 그러나 시험공부 도중 이름조차 쓰기 힘들 정도로 손이 떨리는 증상이 나타났고 그 때문에 법률가의 꿈도 접어야 했다. 실패자라는 좌절을 어느 정도 극복할 무렵 그는 구로공단으로 달려갔다. 대학 때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하며 찾았던 그곳에서 이번에는 한국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익힌 지식을 활용해 법률문제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고 그때를 돌아본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 인권단체인 외국인노동자피난처에서 법률상담 간사로 1994년부터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부인 조명숙씨도 그곳에서 만났다. 조씨는 학창시절 공부만 아는 공부벌레도, 어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모범생도 아니었다. 성격은 명랑했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 3학년이던 1993년 봄날,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그의 삶이 바뀌었다. 수화기 너머의 남성이 영어로 뭐라고 했고 조씨는 영어로 "잘못 걸었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상대편이 다시 전화해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외국인노동자 친구가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매우 아프니 영어를 할 줄 알면 와서 도와달라고 어눌한 한국말로 애원했다. 조씨는 "낯선 외국 남성의 전화를 받고 당황하기도 하고 의심도 들었지만 매몰차게 뿌리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결국 외국인노동자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그가 보상을 받도록 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파키스탄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사용자에게 여권을 뺏기는 등의 억울한 일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청했고 그는 그 뒤 자연스럽게 외국인노동자피난처 일을 하게 됐다. 이곳은 이씨, 조씨 등을 포함해 모두 4명이 활동하는 작은 단체였는데 함께 일을 하다가 두 사람이 친해져서 결혼에 이르렀다. 물론 나이 차가 커 조씨의 집에서는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와 재중동포의 사기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씨를 한국일보가 '쥐띠 30대 2인의 송년'이라는 제목의 작은 기사로 1996년 말 소개한 것을 계기로 조씨의 집안에서도 그가 좋은 일을 한다고 인정해 결혼할 수 있었다.

탈북 난민 만나 난민 문제 문떠

두 사람은 처음에는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90년대 초, 중반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온갖 불이익을 받던 때였다. 그러다가 94년 불법체류자도 산업재해, 임금체불 등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보상받을 수 있는 법률이 생겼다. 두 사람은 그때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임금체불 등의 불이익을 받고도 제 나라로 쫓겨간 사람들에게 이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중국, 필리핀 등으로 날아갔다. 중국에서는 재중동포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을 통해 탈북자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 기아 등을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가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 부부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한다.

97년 4월 결혼한 부부는 중국 남부의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등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그 길에 재중동포가 많은 옌지(延吉)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탈북자들을 돕는다. 쉼터를 제공하고 일자리도 알선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결혼반지 등 돈이 될만한 것은 다 팔아 경비를 댔다. 두 사람은 "그 때는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탈북 난민을 만나면서 부부는 비로소 난민 문제에 눈을 떴다.

1999년 피난처를 만든 뒤 처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쿠르드인 말살정책을 피해 한국으로 들어온 쿠르드인 세 사람이었다.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으나 인정이 거부돼 쫓겨나게 생겼다며 도와달라는 이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난민 신청자는 신체 일부를 훼손하거나 사형에 처할 것을 규정한 이라크의 포고령 자료를 입수, 법무부에 제출했더니 체류 허가가 나왔다.

그 뒤 군사정권을 피해 한국에 들어온 버마 난민, 자치를 얻기 위해 싸우던 방글라데시의 소수민족 줌머 난민, 종교적 차이로 결혼과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이란 난민 등과 만났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콩고 출신의 욤비다. 그는 콩고의 고위 정보요원이었으나 야당 활동이 문제돼 수감됐다가 탈출, 한국으로 피난 와 2002년 11월 난민신청을 했으나 이후 5년 동안이나 난민인정 문제로 씨름해야 했다. 이호택씨는 리더십과 좋은 품성을 갖춘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그를 돕기로 하고 콩고로 들어가 욤비가 귀국할 경우 닥칠 위험 상황에 대한 자료를 챙겨 그가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했다. 욤비는 그 뒤 성공회대에서 NGO학을 공부했으며 지금은 치과병원에서 사무 일을 하고 있다. 가끔 대중강연도 한다.

부부는 이처럼 난민인정절차 진행을 지원하는 것 외에 교회, 개인 등의 기증을 받아 난민들에게 옷을 제공하고 이사하는 사람들로부터 가구, 가전제품 등을 얻어 나눠주기도 한다. 난민 신청자는 취업이 금지되며 만약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한국에 있으면 불법 체류자가 돼 경제적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탈북자 야학(자유터학교)을 운영하는 등 탈북자를 돕는 활동도 활발하다. 조명숙씨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의 교감도 맡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난민과 탈북자 모두를 돕는 일을 하면서 "당신들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 당황스럽다고 말한다. 난민문제는 진보진영이, 탈북자문제는 보수진영이 주로 다루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서는 양쪽으로부터 달갑지 못한 눈길을 받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조명숙씨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보면 우리의 활동은 모순적으로 비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과 탈북자를 도와왔다"고 말한다.

■ 국내 난민 3000명 추정… 정부서 인정은 217명 뿐

이호택 피난처 대표는 일반인에게 난민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도 난민이 있는지, 그들이 왜 하필 한국으로 왔는지, 한국이 그들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를 되묻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난민 문제가 제기된 지 제법 됐는데도 일반인에게는 여전히 관심 밖인 것이다.

한국에는 현재 네팔, 중국,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우간다, 이집트, 러시아, 소말리아 등 50여 개국에서 3,000명 정도의 난민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11월 현재 217명에 불과하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으나 2000년까지 단 한 명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민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이호택씨는 말한다. 국회는 현재 난민등의지위및처우에관한법률을 심의하고 있다. 시민단체 등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법률인데 난민 신청자의 처우 등을 담고 있다.

이호택씨는 "한국과 외국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어 난민 신청자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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