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을 전후해 미국 유럽 등 서구에서 도입된 민방위 제도는 '적의 군사적 침략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산 상의 피해를 최소화기 위해 민간인에 의해 실시되는 비군사적 방어행위'로 정의된다. 전ㆍ후방이 따로 없고 국가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는 총력전 양상의 근대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화생방(화학ㆍ생물학ㆍ방사선) 무기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전투기와 미사일 등 대량 살상무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커짐에 따라 민방위는 군사력과 함께 현대적 국가방위의 기본조건이 됐다.
■ 하지만 1975년 민방위기본법 제정과 함께 우리나라에 도입된 민방위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이거나 종종 냉소적이다. 군사정부가 유신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동원체제의 일환으로 강제한 기억이 남아 있고 구체적 교육과 훈련의 내용 역시 체제 홍보나 킬링 타임용에 그쳐 생업만 방해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지속돼 사회의 긴장도가 떨어진 탓도 크다. 그러다 보니 80년대까지 행정안전부(옛 내무부) 내 본부급이었던 민방위 관할 조직은 지금은 소방방재청의 1개과(민방위과)로 축소됐고, 예산ㆍ인력ㆍ훈련 모두 찬밥신세가 됐다.
■ 정부가 오는 15일 연평도처럼 북한이 도발하는 실전상황을 가상해 비상대피와 피해 복구에 이르는 전국 단위의 특별 민방위 훈련을 실시키로 했다. 1, 2, 7, 12월 등 혹한ㆍ혹서기에는 훈련이 없으나 상황이 엄중하고 국민의 불안이 큰 만큼 실질적인 대처능력을 점검하고 배양하겠다는 뜻이다. 소방방재청은 또 이론과 동영상 강의 위주의 민방위 교육을 전쟁 혹은 재난 시 응급처치 등 대처요령을 몸으로 익히는 '생존훈련센터' 체험학습으로 대체한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연평도 피격을 교훈 삼아 민방위 체제의 일대 쇄신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정도의 대책으로는 수박 겉핥기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소방방재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5분의 1인 1,000만명 이상이 민방위 경보조차 들리지 않는 지역에 살고 있다. 적이 침공하거나 재해가 발생해도 이들이 제때 대처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방공호 방독면 등 대피시설과 장비가 낡은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 스위스 등 평시 선진국일수록 민방위체제가 잘 갖춰져 있는 것을 떠올리면, 불벼락 운운하는 현실적 위험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참 무디게 살아온 셈이다. 그러니 작은 재해에도 늘상 허둥대는 것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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