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8월 23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의 최전방 기지인 금문도(金門島)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44일 간 47만4,000발의 포탄을 쏟아 부은 대공세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은 중국 해안에서 헤엄쳐서도 건널 거리의 이 작은 섬을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대만군이 섬 전체를 그물망같이 지하요새화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버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종군 순직 기자인 최병우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겸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바로 이 전투 취재 중에 희생됐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에도 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으나 막대한 희생만 치른 채 뜻을 이루지 못했다.
■ 58년 전투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인민해방군의 금문도 포격은 1979년 1월 1일을 기해 중단됐다. 핑퐁외교의 결실인 미중 수교의 효과였다. 금문도는 그 후 전혀 다른 면모로 바뀌었다. 대만과 본토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전쟁의 섬에서 교류와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포탄이 날아가던 바다에서는 1991년 계엄령이 해제된 후 밤마다 생필품을 교환하는 작은 목선들의 암시장이 섰다. 양안 화해무드의 결정체인 통상 통항 통신의 3통도 이 섬을 매개로 이뤄졌다.
■ 치열한 전투의 상흔과 지하요새는 이제 관광상품이 되어 섬 주민들의 생계를 돕고 있다. 인민해방군이 쏟아 부은 포탄 껍질로 만드는 '포탄 나이프'는 평화의 섬, 관광의 섬으로 바뀐 금문도를 잘 상징한다. 세계의 주당들이 알아주는 금문 고량주는 섬 전체를 뒤덮은 포격 속에서도 지하 저장고에서 끄떡 없이 숙성됐다는 스토리까지 덧붙여져 명성을 더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지노 유치 추진으로 섬이 들떠 있다. 관광산업을 가로막는 7,000~8,000명의 주둔 군까지 철수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 이명박 대통령이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연평도와 백령도 등 서해 5도의 군사 요새화를 점진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다분히 금문도 사례를 염두에 두고 한 얘기다. 이에 따라 군 당국은 금문도의 지하 요새를 참고하기 위해 시찰단 파견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찰단이 금문도에 파견되면 먼저 보게 될 것은 지하요새가 아니라 양안교류의 전초기지가 된 금문도의 모습일 것이다. 서해 5도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들은 협력으로 나아가는데 거꾸로 가는 우리의 처지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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