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火魔)는 그의 삶을 앗아갔으나 그는 꺼져가는 생명에 삶의 불씨를 심었다.
지난달 22일 발생한 서울 삼성동 빌딩방화 참사로 뇌사에 빠졌던 고(故) 주소정(42)씨의 유족은 7일 고인의 간과 각막, 신체조직 등을 기증했다. 사건발생 보름째인 이날 주씨는 방화사건의 다섯 번째 사망자가 됐다.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빈소에서 만난 동생 주정규(40)씨는 "아직도 누이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지만, 누이가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라며 눈물을 삼켰다.
사건 당일 주씨는 평소처럼 오전 5시20분께 일어나 삼성동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부동산컨설팅을 하던 주씨는 오후4시쯤 일을 마치고 동료들의 잡무를 도와주다 변을 당했다. 오후5시쯤 전 부인을 만나러 온 김모(49)씨가 사무실 입구에서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하면서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사무실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주씨는 직장동료들과 함께 바닥에 엎드려 전화를 걸려고 시도했지만 기도(氣道)에 뜨거운 열기가 들어차면서 의식을 잃었다. 오후5시55분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처음 연락을 받은 정규씨는 "뜨거운 열 때문에 누이가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눈 앞이 캄캄하고 나의 누이가 아닌 것만 같았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호흡기로 연명하던 주씨의 숨결은 시나브로 옅어졌다. 오빠 인섭(44)씨가 어렵사리 가족에게 입을 뗐다. "평소에 남을 잘 도와주던 아이였으니 현아(고인의 옛 이름)가 다른 이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면 기뻐하지 않을까." 고인의 어머니 공기자(67)씨도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씨 역시 몇 년 전 장기기증을 서약하고, 매달 5,000원씩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도와온 터였다. "(저는) 딸을 가슴에 묻지만, 딸이 다른 사람의 눈이 되고 간이 돼 오래오래 건강하길 바래요."
고인은 생전에 남을 잘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직장동료 이주희(45)씨는 "항상 밝고 씩씩하게 살던 동생의 비보를 듣고 한동안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며 "명절 때 떡 과일을 한아름 싸와 혼자 사는 나를 챙겨주곤 했다"고 했다.
동생 정규씨는 "자기 것을 내어서라도 동생이나 친구들을 도운 누이는 화수분 같은 존재"라고 울먹였다. 1978년 식구들이 전북 부안군에서 상경해 궁핍했을 때 고인은 부모를 대신해 밥을 짓고 동생 뒷바라지를 도맡았다고 했다. 사고 직전까지도 고인은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살며 생계를 책임졌다.
이날 주씨의 간을 기증받은50대 남성은 2주 안에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위급한 간암환자였다. 병원 관계자는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레 생명을 잃으셨던 터라 결정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값진 생명을 구하셔서 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품이 된 노트엔 이런 메모가 있었다. '120억원을 힘없고 외롭고 지친 사람들을 마음껏 도와주고 싶다.' 그는 돈보다 값진 생명의 온기를 세상에 남기고 갔다. 어머니 공씨는 아직도 매일 새벽 5시20분이면 가슴이 찢어진다. "딸의 휴대폰 알람이 울려요. 당장이라도 일어나 출근할 것 같은데…."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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