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은 1973년 경주 계림로(鷄林路)공사로 발굴된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이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를 끄는 유물이 보물 제635호로 지정된 황금보검이다. 정식명칭은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으로 검집에 들어있는 철검은 길이 18.5cm의 단검이다. 당시 계림로에서 발굴된 신라무덤은 총 56기로 그 가운데 이 보검이 출토된 무덤은 제14호 무덤이다.
천년 고도 경주는 1970년대에 들어와 큰 변화를 맞이한다. 1971년 6월 포항제철 고로점화식(高爐點火式)에 참석하고 귀경길에 오른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가족과 경주를 돌아보고 난 후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경주관광개발계획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하게 된다. 지시를 받은 경제수석은 그 해 ‘경주관광개발 종합10개년 계획’을 마련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계획에 포함된 많은 사업 가운데 동서로 마련된 옛 경주시청 앞 도로와 첨성대 지역을 연결하는 계림로 신설공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계림로 공사는 당초 매장문화재 조사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추진되었다. 도로의 양측에 배수관을 설치하기 위한 공사 중 신라무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공사담당 회사는 그저 며칠간 노출된 유물을 수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발굴조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루 이틀에 모든 조사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5월 하순부터 시작된 발굴은 8월 말경에야 일단락되어 3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조사된 신라무덤 56기 가운데 14호 고분에 대한 보고서가 금년 10월 출간되었다. 비록 37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국립경주박물관에서 5년간의 유물 정리와 보존처리를 마치고 마침내 세상에 내놓았다. 보고서에 의하면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30대의 두 남자가 동시에 나란히 묻혔음이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고 아울러 왼편 피장자의 몸에 이 황금보검이 가로로 놓여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 귀걸이를 비롯한 장식품 등 무려 270여 점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보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보검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유행한 단검 형태에 동로마제국 및 5세기 유럽 각지의 이민족 사이에 펴져 나가던 금세공기술(cloisonne기법)이 결합한 것으로 이러한 형태의 단검을 사용하던 중앙아시아 집단이 동로마제국 또는 동유럽의 이민족과 접촉하여 이 지역의 장인에게 제작하도록 한 것이다.
제작지는 두 세력이 접촉할 가능성이 큰 흑해연안이 유력하나 금세공기술자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 보검은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동유럽 지역과의 역동적인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보검의 제작 역시 여러 집단 사이의 접촉과 교류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고 결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보검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고 수입된 것으로 잠정 결론지어졌다. 당시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서양간의 교류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이런 위세품(威勢品)이 신라에 들어와 무덤에 묻혔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