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들, 키가 아직 좀 덜 자랐네. 어서어서 더 커야지…." 큰 키를 선호하는 트렌드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1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 1만6,500m²(5,000평) 대파밭 앞에 선 농민 배한식(54)씨의 말투에 걱정이 묻어났다. 키가 177㎝인 그의 명치까지 올라온 대파가 빼곡한 데도 만족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주변의 파밭과 언뜻 비교해 봐도 2배는 훌쩍 넘는 '키다리' 대파다. "그래도 흰 부분은 참 길고 예쁘게 자랐네. 이렇게 뽀얘야 향이 강하고 좋거든."
#대파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를 실어 왔다는 농민 조영길(52)씨는 차의 트렁크가 아닌 뒷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길이 3m는 족히 넘을 막대기. 파의 키를 크게 하려면 뿌리 주변에 흙을 덮는 소위 '북주기' 작업이 필요한데, 이 때 파가 쓰러지지 않도록 고랑 사이에 넣어 파의 허리께를 떠 받치는 기구로 쓰기 위한 것. 그는"농업 기계화로 필요 없게 된 이 기구를 20여 년 만에 처음 꺼내 들었다"고 했다. "사람이나 파나 키를 크게 하려면 역시 손으로 돌보는 정성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대파밭만 198만 3,400㎡(60만평)에 달하는 국내 유명 대파 산지인 부산 명지동의 명지농협 농민들에게 새로운 특명이 내려졌다. 대파를 최대한 길게 재배해 명품 대파인 '키다리 대파'를 만드는 것. 대파는 연백부로 불리는 아래쪽 흰 부분이 길고 단단하며 광택이 있을수록 상품(上品)으로 분류된다.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과 플라보노이드 등도 바로 이 연백부에 집중돼 있다.
32명의 농민으로 구성된 명지대파 공선출하회(출하계약에 따라 공동선별, 공동계산을 실천하는 회원제 조직)는 연백부가 긴 명품 대파 생산을 목표로 지난 1년여 간 힘을 모았다.
사실 이웃한 일본만 해도 연백부가 50㎝ 이상으로, 가격은 우리나라 파 평균 가격의 4배 가까이 되는 프리미엄 대파가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연백부가 긴 대파의 명맥이 20여년 전부터 끊긴 상태다.
파를 최대한 크게 키워 연백부를 길게 하려면 파 뿌리 부분을 흙으로 둑처럼 쌓는 북주기가 핵심이지만 인건비 상승으로 현재는 이 작업을 모두 기계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 작업으로 키운 대파는 수작업에 비해 흙이 단단하게 쌓이지 않고 이랑도 낮아져 이랑 속에 묻히는 부분인 연백부가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배한식 회장을 비롯한 공선출하회 회원들은 명지 대파의 명성을 이끈 90년 전통의 농법을 복원키로 했다. 대나무로 파의 허리께를 받치고 삽처럼 생긴 기구로 흙을 퍼 올리자면 기계로 하루에 9,900㎡(3,000평)이나 할 수 있는 작업을 인부 4~5명을 동원해도 495㎡(150평)를 끝낼까 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결과물은 남다르다. 기계식 설비만 사용한 일반 대파가 30cm 가량 높이의 이랑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것과 달리 손으로 5,6차례 북주기 작업을 진행한 대파 이랑의 높이는 50cm가 넘는다. "그나마도 고운 모래흙이 대부분인 명지동의 토양 환경 정도나 되니 연백부가 긴 명품 대파 생산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배 회장의 말투에 자신감이 넘쳐났다.
공선출하회는 이렇게 기른 '연백부가 긴 명지 대파'를 11일 미리 계약한 이마트를 통해 출시한다. 가격은 일반 대파보다 20~30% 높게 책정될 예정이다. 회원들은 이 상품을 통해 한때 국내 대파 생산의 70%를 차지했던 부산 명지 대파의 명성이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마트와 계약재배 관계를 맺어오면서 상품화에 눈을 뜬 이들 회원들은 이미'잘게 자른 대파'와 같은 상품을 기획하고 있기도 하다. 공선출하회의 판매를 돕는 명지농협의 민병존 차장은 "농산물도 공산품과 똑같다"며 "잘 키우는 게 기본이겠지만 어떻게 소비자 기호에 맞도록 농산물을 가공하느냐가 농촌의 경쟁력을 높여 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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