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세츠코. 1940~5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의 원로 여배우다. 서구의 숱한 영화인들이 존경심을 표하는 일본감독 오즈 야스지로(1903~1963)의 영화를 보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인물이다. 커다란 눈에 시원시원한 서구적 마스크는 뭇 남성들의 심장박동 수를 높일 만도 하다.
전후 일본 주둔 미군 고위 장교를 상대로 간첩활동을 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빼어난 용모를 지녔던 하라는 나이 마흔을 넘자 은퇴를 선언하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더 이상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죄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63년 오즈의 장례식 참석을 제외하곤 철저히 행적을 감췄다. 올해로 아흔 살에 이르렀지만 대중의 뇌리 속에 하라의 노화는 마흔 언저리에 정지돼 있다.
많은 배우들, 특히 앳된 얼굴로 대중의 마음을 얻은 배우들은 젊은 이미지 속에 머물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대체로 세월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레 나이에 맞는 역을 맡게 된다. 스타라는 달콤하고도 짧은 꿈에 집착하면 할수록 연기의 맛은 쓰디 쓸 뿐이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이층의 악당’이 5일까지 50만(이하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관객을 모았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농익은 연기 앙상블이 무척 많은 웃음을 자아내는 수작 코미디인데도 손익분기점을 못 넘길 가능성이 짙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 캐스팅을 흥행 부진 요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꽤 있다. 20대 젊은 관객들이 개봉 첫 주 시장을 좌우하고, 개봉 첫 주 성적이 최종 흥행 결과를 거의 결정하는 국내 극장가의 특성을 감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층의 악당’과 달리 ‘초능력자’는 배우 얼굴 덕을 본 영화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강동원, 고수 두 꽃미남 배우들이 ‘외모 초능력’을 발휘하며 영화 완성도에 비하면 좀 과분하다 할 211만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초창기부터 영화는 대체로 스타 놀음이었다. 새 별이 뜨면 옛 별이 지고, 주연급의 세대교체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한 영화인은 “연기 달인 메릴 스트립조차도 나이 때문에 캐스팅이 안돼 고민한다”고 전한다. 연기력과 명성만으로는 할리우드에서도 캐스팅과 흥행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중의 배우 선호가 변덕스럽다 하더라도 좋은 영화가 입 소문 덕에 흥행 늦바람을 탈순 없는 걸까. 미국엔 장기상영이라는 일종의 패자부활 기회가 있기에 스트립은 꾸준히 출연작을 늘려가는 듯하다. 개봉 첫 주 흥행에 모든 걸 거는 흥행 공식이 횡행하는 충무로에선 언감생심의 일이다. 스스로 낭만적인 퇴장을 택한 하라와 달리 왜곡된 시장에 떠밀려 뛰어난 중년 배우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면 충무로는 어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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