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귀재… 소설가 꿈꾸는 칠순의 신발쟁이 "Just Do It"
그린 위에서 퍼팅을 성공시킨 뒤 오른손을 불끈 쥐는 타이거 우즈와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덩크슛을 넣는 마이클 조던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두 사람의 얼굴과 함께 자연스레 그려지는 이미지가 하나 있을 것이다.
영어 알파벳 브이(V)자를 흘려 쓴 후 옆으로 뉘어 놓은 듯한 이미지, 바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로고다. 우즈가 입은 티셔츠의 왼쪽 가슴과 조던이 신은 운동화엔 어김없이 이 로고가 붙어있다. 육상 선수 출신으로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었으며 2010년 현재 미국 23번째(포브스) 부자이기도 한 필 나이트(72). 그는 어떤 사람일까.
승리의 여신 니케(Nike)
나이트는 1938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변호사로 일하다 나중에 신문을 발행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중거리 육상선수였던 나이트는 오리건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면서 육상도 계속했다. 1마일(약 1.6km)을 4분10초에 돌파한 것이 그의 최고기록.
대학 졸업 후 1년간 군대에 갔다 온 뒤 스탠포드대 경영대학원을 다녔는데, 여기서 운명적인 수업을 듣게 된다. 창업론 강의였는데 나이트는 이 수업을 들으며 기업가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교수님이 기업가의 자질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진정 원하는 일을 찾은 거죠."
1962년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여행을 갔던 나이트는 고베에서 일본 운동화 제조업체 오니츠카 타이거(현재 아식스)의 싸고 품질 좋은 신발을 보게 됐다. 이 신발을 미국에 수입해 팔기로 하고 자신의 육상 코치였던 빌 보워먼(1911~1999)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는데, 보워먼은 동업을 제안했다. 64년 두 사람은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BRS)'라는 회사를 차린다. 창업 초기 조그만 승합차에 신발을 싣고 다니며 팔았던 나이트는 70년대 후반에는 미국 운동화 시장의 절반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회사를 성장시킨다.
나이키 브랜드가 탄생한 건 71년. 나이트의 대학 동료이자 BRS 첫 직원인 제프 존스가 그리스 신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연상해 이름을 지었고, 세계적 브랜드가 된 로고는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나이트에게서 회계학 강의를 들은 캐롤린 데이비슨이라는 여대생이 만들었다. 12년 뒤 나이트가 브랜드 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와 거액의 회사 주식을 건네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는 했으나, 이 여학생이 71년 도안의 대가로 받은 돈은 35달러가 전부였다.
나이키를 급성장시킨 일등공신 중 하나는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마이클 조던이다. 나이키의 최고 히트작 중 하나인 '에어조던'은 85년 조던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며 만든 신발이다. 그런데 당시 조던이 이 운동화를 신는 것은 규정에 어긋났다. 당시 NBA는 통일된 색깔의 농구화만 신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흑색과 적색이 어우러진 '에어조던1'은 제재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 신발을 계속 신었고, NBA는 경기마다 5,000달러씩 제재금을 부과했다. 나이키는 이 돈을 모두 냈지만 그 금액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홍보 효과를 얻었다.
또다른 일등공신은 타이거 우즈. 우즈의 가능성을 엿본 나이키는 어렸을 때부터 그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며 계약을 맺었다. 요컨대 조던과 우즈라는 두 스포츠 천재가 나이키 제품에 상품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나이키는 하나의 상징, 아이콘이 된 것이다.
백발의 소설가 지망생
물론 화려한 마케팅 뒤엔 나이키를 둘러싼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96년에는 국제 비정부기구(NGO) 옥스팜 인터내셔널이 '나이키가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력을 착취해 이익을 내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도덕성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며 세계적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나자, 나이트는 외국에 하청을 준 공장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악덕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나이트는 모교에 대한 엄청난 기부로도 유명하다. 그가 지금까지 오리건대에 기부한 돈만 2억3,000만달러(약 2,600억원)에 달한다. 기부금은 대부분 육상 등 체육 부문에 쓰인다. 스탠포드대 경영대학원에도 이 대학원 역사상 단일 기부금으로 가장 많은 1억500만달러를 기부했다.
그러나 기부를 둘러싼 논란도 잇따랐는데, 나이트가 그의 친구이자 전직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팻 킬커니를 오리건대 육상 감독으로 임명토록 로비했다는 의혹이 그 대표 사례다. 킬커니는 육상 관련 학위나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04년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난 나이트는 2005년부터 3년간 스탠포드대에서 소설 창작 관련 수업을 들었다. 함께 수업을 들었던 학생에 따르면 그는 이미 20년 전부터 소설을 써왔다고 한다. 칠순의 나이에 소설가를 꿈꾸는 이 기업가의 도전적 행보는 나이키가 88년부터 슬로건으로 내건 '일단 해봐(Just Do it)'를 떠오르게 한다.
다음주에는 '언론 재벌'로 널리 알려진 루퍼트 머독을 소개합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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