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 아닌 이변이었다. 지난 19일 오후 열린 제8회 대한민국영화대상 시상식은 서영희를 위한 자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무대에 올라 최우수여자주연상을 받자 많은 영화인들은 “수상해도 마땅할 연기를 했다”고 입을 모았다. “착한 배우인데 참 잘됐다”는 영화인도 여럿 있었다.
지난 8일 열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시상식에서도 서영희는 여자연기자상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까지 상을 받으리라 전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작 16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제작비 10억원의 저예산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히로인이 TV로 중계되는 더욱 대중적인 영화상의 수상 무대까지 오르리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22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서영희는 “5명이 후보였으니 나에게도 20%의 가능성이 있다고만 기대했지 욕심 내진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게 쉬워 보였는데 왜 나는 높고 험난할까 생각했다”는 서영희의 수상 소감은 많은 영화팬들의 가슴 속에서 공명했다. 좋은 배우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그 동안 여우주연상은 그와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파도’와 ‘추격자’로 여우조연상 후보에만 여러 번 올랐으나 주연상 후보가 된 것은 이번 영화가 처음이다.
“무대에 올라가며 ‘혹시 잘못 불렀나’ 등 별의별 생각이 들더군요. 소감도 딱히 준비하지 않았어요. 예전 시상식에서 박수만 치면서 ‘저 몇 개 안 되는 계단이 참 높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이번에 계단을 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는데 결국 소감 말할 때 계단이 먼저 입에 오르더군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짐승 같은 남편의 폭력과, 시어머니를 위시한 마을 사람들의 방관에 짓밟히다 결국 분연히 일어서는 한 여인의 복수극을 그리고 있다. 덜 떨어진 듯한 표정으로 밥을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고, 아이를 잃은 뒤 반미치광이가 되어 낫을 휘두르다 몸에 피칠갑을 하는 김복남은 충무로의 보통 여배우라면 손사래를 치고도 남을 역할. 서영희는 “시나리오를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복남이 지닌 감정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였던 점도 출연 결정에 힘을 실어줬다.
서영희는 피해자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고 버림 받는 여자(‘질투는 나의 힘’), 몸을 팔면서 힘겹게 딸을 키우다 끝내 살인마의 희생양이 된 출장 안마소 여인(‘추격자’) 등은 착한 희생자라는 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저도 두 남자에게 사랑 받는 그런 밝은 역할 하고 싶었고, 하고 싶죠. 매번 촬영장에선 웃지만 집에 돌아오면 공허하기만 했어요. ‘나도 다른 것 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에요. 회사원들도 때려 친다고 하면서 다음날 아침 일어나 출근하잖아요. 저도 촬영 일정 잡히면 열심히 연기하고 끝나면 ‘난 도대체 뭐지’라고 생각했어요. 착한 이미지가 꼭 싫진 않지만 배역의 한계를 벗고 싶어서 ‘내가 좀 못돼져야 하나, 함부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서영희는 “상을 받으면 세상이 변할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축하 문자 메시지 받느라 휴대폰이 좀 바빠진 것 빼놓고선 딱히 달라진 게 없다”며 환히 웃었다. 그저 “내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잘 살아왔구나. 이제 정말 배우로 인증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라고 덧붙였다.
“블로그 등에 ‘서영희 다음 영화는 무조건 본다’는 말이 있더군요. 제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인데 이렇게 부담스러운 건지 몰랐어요. 수상으로 마음이 들뜨기보다 무거워요.”
서영희의 차기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다. 그는 “큰 역할은 아니지만 촬영장 분위기가 너무 포근하고 따스해서 좋다”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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