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를 다시 긴장 국면으로 이끈 '헤커 보고서'의 주인공 지그프리드 헤커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CISAC) 소장은 그 동안 북한의 대서방 핵 메신저 역할을 해왔다. 헤커 소장은 2004년 이후 매년 한차례씩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 때마다 북한은 민감한 핵 상황을 그를 통해 공개했다. 지난 12일 7번째 방북한 그에게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여주기에 앞서,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직후에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그의 입을 빌려 서방에 전달했다. 2008년 2월에는 방북한 그에게 영변 핵시설 해체 가능성을 처음 언급한 뒤 4개월 만에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헤커 소장은 그 때마다 보고서를 공개해, 영향력 있는 북핵 전문가로 자리를 굳혔다.
북한이 이처럼 헤커 소장에게 파장이 큰 고급 정보나 민감한 시설을 공개해 자신들의 메신저로 활용하는 것은 일단 그가 저명한 핵 과학자이자 핵무기 전문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위 정치인보다 더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폴란드계 미국인인 헤커 소장은 최고의 핵 과학연구소인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 10여년 일했으며, 2009년에는 미 정부가 수여하는 가장 권위 있는 에너지부문 상인 엔리코 페르미상을 수상했다. 헤커 소장은 특히 올해에만 '북한위기의 교훈''북한의 선택'등의 논문을 발표하며 특히 북핵 문제에 천착하는 모습이다. 이런 경력과 전문성, 과학계에서의 위상 등을 고려해 북한이 헤커를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헤커 소장을 지속적으로 활용해왔지만 미 당국이 특별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그가 전하는 내용은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8쪽짜리 '헤커 보고서'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측면에선 헤커 소장은 미 당국에도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다만 헤커 소장은 북한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고 와서 북한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만을 전달하는데 주안점을 둔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헤커 소장이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답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한계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이번에 제재완화 등 대북 정책의 변화를 추구했다면 그것은 일정부분 성공했다. 헤커 소장과 함께 방북했던 국무부 정보조사국 출신 로버트 칼린 스탠퍼드대 객원연구원이 "북한의 그렇게 많은 원심분리기를 보고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면서 "미국이 추진하는 정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보여줬다"고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언급을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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