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고등학교 때 주산과 부기는 필수였다. 부기는 '자산, 자본, 부채의 수지와 증감을 밝히는 기장법', 즉 회사의 영업 장부를 정리하는 것이다. 주산과 부기는 자격증 시험이 있었다. 시험을 쳐서 자격증을 따야 상급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타자 자격증, 펜글씨 자격증도 따야 했다.
지금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부기에서 배운 대차대조표는 잊히지 않는다. 대차대조표는 기업이나 개인의 재정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표다. 가끔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본다. 올 가을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니 내가 추위를 많이 탄다고 고교 동창 인수가 연구실로 보내준 전기난로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보내주신 쌀과 사과 등 '자산의 증가'가 눈에 확 뛴다.
어머니가 '올 겨울은 쌀과 과일 걱정이 없겠다'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고맙고 따뜻하고 배부른 선물인가. 그분들이 나에게 베푸는 사랑은 나보다 나의 시에 대한 격려이며 애정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올 가을 동안 달랑 짧은 시 5편, 동시 2편을 생산한 것이 전부다.
결국 나는 그분들이 투자한 만큼 이익을 내지 못했다. 이번 분기 나는 불량 시인이다. 대차대조표는 순이익이 나야 하는데 잔뜩 순손실만 쌓아 놓았으니, 나는 적자 시인이다. 하지만 부기 수업에서 배웠다. 부채도 자산이다. 그 부채자산을 갚기 위해 올 겨울 나는! 올 겨울 나는!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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