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하 지음
소명출판 발행ㆍ270쪽ㆍ1만2,000원
중국은 포스터와 표어 천지다. 베이징의 얼굴인 텐안먼 주변만 해도‘중국 공산당 만세’, ‘무적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같은 구호가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 자본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오늘의 중국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유영하(48) 백석대 중국어학과 교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실체를 ‘표어’라는 창으로 들여다본다. 유구한 중화문명을 상징하는 만리장성이나, 고도성장의 랜드마크인 상하이의 동방밍주같은 것들이 아니라 거리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표어를 관찰하면 중국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2년 전 연구년을 맞아 거주했던 광저우를 비롯해 우한, 베이징 등의 대도시를 오가며 표어를 자세히 관찰해 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중국은 ‘중화인민표어공화국’이다. 불조심을 강조하는‘화재는 무정하니 생명을 아끼자’, 도덕적 훈계나 다름없는 ‘ 폭언을 하지 말자’, ‘부부 사이에는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자’까지 온갖 표어가 넘쳐난다.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있다.‘조국을 열애하고 조국을 건설하자’처럼 애국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것, ‘2개의 미사일과 1개의 위성은 위대한 민족정신의 개가’ 같이 국방력 증진에 관한 것, ‘조화사회를 이루자’등 후진타오 주석의 통치철학을 담고 있는 표어 등이다. 저자는 이런 표어들이 “사회적으로 세계관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중국의 분위기를 보여준다”며 비판한다. 애국주의를 선동함으로써 빈부 격차와 도농 격차 등 중국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함부로 길을 건너지 않는다’’알아서 줄을 서자’ 같은 구호에서는 중국의 계몽 강박증을 읽는다. 이런 규범들은 대개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개인이 지켜야할 공중도덕들인데, 급격한 도시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도시인이 넘쳐나기 때문에 애써 강조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표어로 사람들을 계몽하려는 중국 지배층의 몸짓은 처절할 정도인데, 그로 인한 표어 과잉이 더 이상 계몽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중국근현대문학을 전공한 저자는“중국을 통해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국에 난무하는 계몽적인 표어들은 외형 위주의 근대화만 추구하다 정작 근대화에 따라야할 시민 개개인의 자율성은 고양되지 못한 ‘지체 현상’을 보여준다는 것. 중국과 비슷한 물질주의적 근대화의 길을 걸어온 우리 사회에도 이런 지체 현상은 여전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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