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다니는 딸아이가 지난 주 대학원 시험을 봤던 모양이다. 시험 친 사실을 고백하려 했던 게 아니라 '가슴 아픈 에피소드'를 얘기하느라 발설했던 것이다. 논술과목에 'G20의 의미'를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마지막 결론으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국제대회가 되어야 한다'고 썼다는데, 답안지를 내면서 보니 '…유명무실(有名無實)한…'이라고 돼 있었다는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완전히 거꾸로 썼다며 반은 울고 반은 웃으며 얘기했다. '입술을 떠난 말을 마구 손을 뻗어 잡아들이고 싶은 경우'로 비유하며 "잊어라"고 위로해 주었다.
■ 시험이란 다 그런 것이다. 고교입시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다음 중 지구의 모습과 가장 닮은 그림은? ①완전한 원 ②약간 타원형, ③ ④는 전혀 다른 모양. ②를 선택하고 나오는데 순간 생각하니 답은 ①이었다. 그 때의 황당함과 회한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있다. 그 흔한 우주에서 본 지구모습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 어린 마음에 당혹하고 불안했던 심정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거나 모르는 문제가 나와 실점을 당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실점을 당하는 상황이 흔한 게 시험이다. 잊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 어제 71만 예비대학생의 수능시험이 끝났다. 직계가족만 해도 거의 300만에 가까운 국민이 애를 태웠다. 결코 잊기 어려운 실점에 당혹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어디 수험생뿐이겠는가. '어제 아침 10분만 일찍 아이를 깨웠어야 했는데, 점심으로 밥 대신 샌드위치를 싸줬어야 했는데' 등은 그렇다 치자. 사흘 전에 했던 잔소리에 후회가 생기고, 지난 주에 먹였던 쇠고기가 수입산이었던 것도 마음에 걸린다. 지나간 일에 '이프(if)'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잘 알지만 그저 '이프'에 매달리고 그것에 붙잡혀 창창한 현재와 미래를 허비하는 게 삶이다.
■ ①대신 ②를 적어내고 나와 죽을 상을 짓고 있었더니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선친께서 말씀하셨다. "야 임마, 실제 지구는 타원형이니 네 생각도 틀리지 않았어, 잊어버려." 그 충고를 흉내 내어 딸아이에게 말했다. "야 임마, 명실상부든 유명무실이든 G20의 의미는 적어냈으니 됐어."라고. ②와 ①과 같은 과오를 그 날 이후 별로 저지른 기억이 없다. 수험생 본인이나 주변의 '이프'가 없을 수 없다. 스스로 깊고도 오랫동안 새겨져 남아있을 터이다. 그러나 잊어버리라고 서로 얘기하자. 앞으로 남은 시간, 지금부터 새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