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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신의주에서 만난 윤진형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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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신의주에서 만난 윤진형 어린이

입력
2010.11.1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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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어린이를 위한 의료ㆍ영양ㆍ교육 지원사업을 하는 민간단체'어린이어깨동무'의 일원으로 북한 신의주를 다녀왔다. 지난번 폭우로 압록강이 범람하는 물난리를 겪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은 신의주에 식량을 전달하고 피해 실태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다.

그 동안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였던 압록강 국경의 조중친선우의교(朝中親善友誼橋)를 건너서 도착한 신의주의 모습은 여느 북한 도시와 큰 차이는 없었다. 관례대로 신의주 중심에 높이 솟아 있는 김일성 주석 동상을 참관하고 북한 실무자들과 일정 협의를 한 후,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신의주 본부유치원'이었다.

비 새는 유치원, 대단한 공연

본부동(洞)과 광문동에 사는 어린이들이 다닌다는 유치원은 최고지도자들이 각별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라고 27년 경력의'노력영웅' 원장 선생님의 자랑이 대단하였다. 2000년 서울을 방문한 소년예술단에서 북을 기가 막히게 잘 쳐서 관심을 모았던 소년과,'아리랑' 공연에서 신기에 가까운 줄넘기 묘기를 보인 팀도 본부유치원 아이들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멀리서 오신 손님들을 위한 아이들의 공연은 노래 춤 율동, 그리고 운동까지 잠시도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공연도 탁월하였다. 노래하던 선생님은 '남자의 자격' 합창단 솔로로 나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후에는 남(南)신의주에 있는'봄향기 화장품'공장을 방문하였다. 처음 공개한다는 공장은 원료 추출에서 포장까지 일관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첨단기술을 돌파하자"는 구호 아래 모든 공정을 컴퓨터로 제어하는 모습이 최근 북한이 강조하는 CNC(컴퓨터수치제어)기술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깜찍한 아이들의 모습과 깔끔한 공장을 뒤로 하고 도착한 곳은 역사책에 나오는 압록강의 섬 위화도(威化島)였다. 신의주 사람들의 식량기지인 5,000여 정보 넓이의 논밭과 살림집들이 있는 위화도는 홍수로 물에 잠겨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었다. 다행히 큰 추위가 오기 전에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천막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옥수수는 썩어 문드러졌고, 여기저기 무너진 제방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잠시 내린 빗물로 진창이 된 위화도를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지친 모습은 내년에나 수확을 기약할 수 있는 논밭과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집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해방식량보급소'에는 남한 교회의 십자가 표지가 선명한 밀가루 부대를 비롯하여 지자체와 민간지원단체들이 보낸 옥수수 더미가 남아있었지만, 올해는 가능하면 의약품보다 식량을 보내줄 수 없느냐는 북쪽 실무자의 부탁에는 절실함이 배어있었다.

북한에 갈 때마다 나를 억누르는 답답함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북한에서 보는 모든 것이 다 '생쑈'라는 절친한 북한 연구자의 말과, 매일 중국 단동(丹東)에서 신의주로 지원물품을 전달하는 적십자 직원들이 있는데도 한 밤중에 주민들 몰래 군부대로 보낸다고 우기는 남한 언론들도 막막함을 더하게 한다.

배곯지 않고 키가 컸으면

유치원에서 내 손을 잡고 현관까지 환송하던 남자아이는 이름이'윤진형'이라고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1시간 남짓한 공연시간에는 비가 내렸다. 신의주의 자랑 본부유치원의 냉기가 감도는 공연실에는 빗물이 스며들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민망한 얼굴로 걸레질을 계속하였다.

통일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그냥 윤진형 어린이가 비가 새지 않는 따스한 유치원에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었으면, 또 남쪽의 같은 또래와 어깨동무할 수 있을 만큼이라도 키가 컸으면, 그리고 젊은 처녀들이 배 곯지 않고 봄향기 화장품을 바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바람이 이뤄지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단동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욱 착잡하였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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