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Fed)의장 시절. 인플레압력을 누르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렸지만 시중금리(장기금리)는 오히려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린스펀도 곤혹스런 표정으로 ‘좀처럼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고, 이 현상을 일컬어 월가에선 ‘그린스펀의 수수께끼(Greenspan’s Conundrum)’라 일컬었다.
나중에 밝혀진 얘기지만, Fed의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장기금리가 떨어진 이유는 중국 등 경상수지 흑자국들이 미 국채를 사들였기 때문이었다. Fed는 금리를 올렸지만 채권수요가 몰려 채권값이 급등하는 바람에 장기금리는 오히려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금 국내에서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16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지만, 시중금리는 오히려 하락한 것. 한은의 정책의도가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 특이한 상황을 놓고 이런저런 해석이 분분한데, 그린스펀에 견줘 ‘김중수(한은총재)의 수수께끼’란 말이 나오고 있다.
거꾸로 가는 금리
한은이 처음 기준금리를 올렸던 7월 이후 시장은 상황을 보면, 기준금리 인상 폭보다 장기금리 하락폭이 더 컸다. 지난 7월14일 3.98%였던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이달 17일 3.35%포인트로 떨어졌고, 5년 만기 국고채 금리도 같은 기간 4.53%에서 3.99%로 하락했다. 기준금리가 두 차례인상을 통해 총 0.50%포인트 오른 4개월 동안 3년물 장기금리는 0.63%포인트, 5년물 장기금리는 0.54%포인트 떨어진 셈이다.
채권금리 하락은 예금과 대출금리 하락으로도 나타났다. 7월 금리인상이 단행될 때만 해도 시중은행들이 예금ㆍ대출 금리를 즉각 인상했지만 이후 시중금리가 하락하자 예금ㆍ대출 금리 역시 떨어졌고,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에 다다랐다.
외국인 채권 매수가 원인?
기준금리와 장기금리가 거꾸로 가는 상황에 대한 가장 일반적 설명은 외국인의 채권 매수 증가다. 중국의 미 국채매수가 ‘그린스펀 수수께끼’의 해답이었던 것처럼, ‘김중수 수수께끼’도 외국인자금이 몰려와 국내 채권을 사들임에 따라 장기금리가 속락하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6년까지 4조6,000억원에 불과했던 외국인 채권 투자는 올해 9월 현재 74조6,000억원에 달한다. 또 외국인이 장기 채권을 선호하면서 잔존만기 1년 이상 채권 보유비중이 2008년 말 44.8%에서 올 8월 66.6%까지 증가했다. 장기채권 수요가 급증하니 금리가 하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날 보고서에서 “외국인 채권투자의 변동이 국내 장·단기금리 관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며 “장·단기금리의 연계성이 약화될 경우 효율적 통화정책 수립에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금통위 신뢰 상실도 원인
하지만 시장에서는 금통위 스스로 시장신뢰를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금통위는 금리인상 신호를 보냈는데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이는 지금의 상황은 결국 금통위가 제때 금리를 못 올리고, 시장에 대해 혼란스런 메시지를 줌으로써, 스스로 시장리더십을 잃은 결과라는 지적이다.
16일 금통위가 끝난 뒤에도 김 총재는 지나친 신중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례로 보아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 “금융완화 기조”라는 문구를 삭제한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는데도 “추가인상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시장은 김 총재의 이런 발언을 ‘당분간 금리인상은 없을 것’으로 해석했고, 이는 결국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시장금리가 폭락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됐다. 최석원 삼성증권 연구원은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김 총재의 발언도 일관성을 갖춰야 했다”며 “금리 정상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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