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름돈 1,000원입니다. 현금 영수증이 필요하신가요?" 지난 9일 서울 시내의 한 편의점. 50㎡(약15평) 남짓한 이 곳의 주인 김영만(40ㆍ가명)씨가 손님을 향해 밝게 웃으며 잔돈과 영수증을 건넨다.
하루에 잠을 서너 시간 밖에 자지 못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단골 손님도 영만씨만의 비밀을 모른다. 그는 북한이탈주민(탈북자)이다.
김씨는 2002년 6월 홀로 두만강을 건넜다. 고향 함경남도 함흥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왜 떠나오게 됐느냐"는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제발 왜 고향 땅을 떠났는지는 묻지 말아주세요. 그 사연을 풀자면 오늘 일을 못할 것 같네요"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목숨을 걸고 찾았지만 한국은 낯선 땅이었다. 정부로부터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받았지만 제대로 세상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막노동 판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배달을 해보기도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김씨는 "돈을 쓰는 것은 쉽지만 그 돈을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는데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며 "더 힘든 건 주변 사람들의 색안경이었다" 고 회상했다. 차츰 의욕도 꺾이고 자신감도 없어졌다.
그런 그에게 구원에 빛이 된 것이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정착 교육을 해주는 굿피플(대표 이영훈)의 자유시민대학이었다. 주말에 수업을 하는 이 학교에서 그는 실제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예금과 적금은 어떻게 다른가', '금리가 오르면 나에게는 어떤 영향이 있는가' 이런 실생활 지식을 배웠다. 같은 처지의 탈북자들끼리 서로를 격려해 주는 것도 큰 힘이 됐다.
수업과정을 수료하자, 굿피풀이 그에게 기회를 줬다. 자금 일부를 지원할 테니 가게를 열어 보라는 것이었다. 편의점 사업이었다. 입지 선정과 경영에 필요한 지식은 훼미리마트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문을 연 것이 지금의 그의 가게. 문을 열기 전날 밤새 그는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처음 해보는 자기 사업인데다 결혼까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결혼을 약속했던 같은 처지의 탈북 여성과는 서울 강서구 00동에 번듯한 전세 집도 마련했다. 김씨는 "꿈만 같다. 가게 문을 연지 1년 만에 이제는 자리를 잡은 것 같다"며 "굿피플과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훼미리마트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불안하게 하루살이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1999년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설립한 굿피플은 국제 난민 구호, 국내 아동 보호 등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중국, 케냐 등 해외에 17개 지부와 국내 9개 지부가 설치돼 있다. 필리핀에서는 9년째 결핵퇴치 사업 등 의료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해남 땅끝마을 지역아동센터 등 아동 보호와 장애인 치료, 농촌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 지원사업은 설립 초기부터 공을 들여 온 중점 사업. 1999년 옥수수 40톤과 비료 1,000톤 지원을 시작으로 북한 아동 의료 지원, 콩기름 공장 건설 지원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탈북자의 정착을 돕기 위해 2002년부터 자유시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8개월 과정의 교육 내용은 재테크에서부터 직장적응 방법에 이르기까지 탈북자의 경제적 자립능력을 키우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수료 후에는 이들의 취ㆍ창업을 위해 기업은 물론 서울시 소상공인지원센터 등과의 연대도 강화하고 있다. 벌써 졸업생이 443명에 이른다. 이 중 취ㆍ창업에 성공해 희망을 키우는 탈북자가 200여명. 그 중 훼미리마트의 도움으로 편의점 사장이 된 이들도 벌써 6명이나 된다.
하지만 굿피플 활동가들은 어떤 도움보다 탈북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린 시각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김선장 굿피플 부회장은 "수업 중에 발음, 억양 교정을 하는 것도 졸업 후 경제활동 중 선입견을 피하기 위한 것"며 "아직 우리 사회가 탈북 동포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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