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두 전직 대통령에 관한 뉴스를 인터넷에서 읽으며 마음이 울적했다. 먼저 그날 오전 구미 생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93회 탄신제'논란이다. 탄신(誕辰)은 사전적 의미로 임금이나 성인(聖人)이 태어난 날인데, 고인에게 그런 표현이 옳으냐고 시비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흔히 쓰는 말을 새삼 논란하는 게 생뚱맞다는 느낌이 앞선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에는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60대 남자가 오물을 뿌렸다.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나, 집에서 1주일이나 오물을 모았다니 정상은 아니다. "좌파세력을 도와 국가 정체성을 혼돈에 빠뜨렸다"고 비난한 전단까지 준비했다고 해서 정신이 온전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편집증(paranoia) 또는 망상(妄想)장애는 인격과 일상을 그런대로 유지하면서도 논리적인 망상에 빠져 비이성적 행동을 한다.
타계한 대통령 모욕은 편집증
이렇게 보면, 두 사건 모두 심각하게 논란할 일은 아닐 수 있다. 고인들을 우러르는 이들은 무슨 소리냐고 역정 낼지 모른다. 그러나, 사리를 벗어난 시비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의 망측한 행동이 고인들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경건한 추모의 정(情)을 방해할 수는 없다. 인터넷 공간에는 험한 댓글 논쟁이 오가지만, 진지한 국민은 애초 두 사건을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인 언행으로 여길 것이다. 건전한 사회라면 그에 어울리게 차분히 대응하고 조처할 일이다.
마음이 울적했던 건, 논란과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언론의 보도 태도를 용인하기 어렵다. 또 정치권의 간사한 반응이 역겹다. 언젠가도 썼듯, 정치 엘리트 노릇을 자처하는 언론과 정치권은 흔히 거짓되고 과장된 논쟁을 부추겨 정치와 사회의 유사 양극화를 유도한다. 그런 이기적 행태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박 대통령 탄신'논란을 전한 언론은 짐짓 중립적 자세이다. 보수 쪽은 "고인의 업적에 비춰 탄신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반면, 진보 쪽은 "반민주적 과오가 크고, 용어 자체가 전근대적"이라고 반박한다는 것이다. 언뜻 균형 잡힌 듯하다. 또 찬반 주장의 옳고 그름을 가릴 책임은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비단 임금이나 성인뿐 아니라 근ㆍ현대사의 숱한 인물을 기려'탄신'을 기념하는 관행을 외면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단군 공자 세종대왕 명성황후 이순신 곽재우 김시민 송시열 신사임당 신채호 안창호 윤봉길 이육사 이승만 유진오 이병철 등 이루 다 열거하기 벅차다. 유명인사가 아니라도 각계에서 존경하는 이의 탄신을 기념하는 경우도 흔하다. 심지어 아이돌 스타의 탄신을 축하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현실에 비춰 보면, 정색하고 '박 대통령 탄신'을 시비하는 이들은 스스로 편집증을 의심할 만하다.
노 전 대통령의 넋을 모욕한 짓은 개인의 돌출 행동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배후까지 수사하라고 언성 높였다. 그러나 굳이 배후를 찾는다면, 고인의 평온한 영면(永眠)을 막은 채 틈만 나면 현실 정치에 끌어들이는 정치세력들을 먼저 지목하고 싶다. 여야 가림 없이 정치적 이익을 노린 간사한 언행으로 편집증을 가진 사람들의 적대적 망상을 부추긴다고 볼 만하다.
엄중한 과제 고인들에 미뤄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며칠 전 "김대중ㆍ노무현 세력에 정권이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외쳤다.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들을 정권 다툼을 위한 구호에 끌어댄 것은 정치 지도자의 도량(度量)이 아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별로 다르지 않다. 봉하마을을 찾아 고인의 뜻을 기리는 것은 좋지만, 입법로비 수사와 관련한 정부 비판에 앞세운 것은 민망하다.
사소하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을 세세하게 따진 것은 현실의 과제와 동떨어진 논란임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이미 고인이 된 이들의 상징에 마냥 기대는 것은 저마다 짊어진 엄중한 책임을 죽은 이에게 미루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난 직후에 쓴 칼럼과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쓴 이유이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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