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대해서 말해볼까. 세 가지 종류의 제목이 있는 것 같다. 이것들은 수학기호 —, 0, +에 얼추 대응된다. 창작물과 수용자가 만날 때 창작자의 어떠한 개입도 불필요하다고 믿는 이들은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시인 말라르메는 제목 없는 소네트를 여러 편 썼고 마크 로스코나 잭슨 폴락 같은 화가의 어떤 작품에는 <무제> 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당연히 제목이 있는 게 관례인 만큼, 이것들은 제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제목을 '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무제(無題)를 마이너스형 제목이라고 하자. 무제>
제목은 정직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한 단어로 된 제목을 선호한다. 제목의 부가가치 창출을 경계하는 최소한의 제목이다. 뺀 것도 더한 것도 없으니 제로형 제목이라고 하자. 이 경우 제목은 작품을 적극적으로 견인하지 않지만, 거꾸로 작품 때문에 그 뜻이 깊어져 하나의 상징으로 격상될 때가 있어 흥미롭다. 예컨대 카프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들에 <변신> <소송> <성(城)>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평범한 세 단어는 그 이후로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되었다. 성(城)> 소송> 변신>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데 성공한 제목들도 있다. 이 경우 제목은 적극적으로 작품을 이끌고 또 떠민다. 제목에 매료되어서 작품으로 진입하게 되는 일도 이 유형에서 생겨난다. 제목이 부가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이므로 플러스형 제목이라고 하자. 책장을 훑어보니 문학 쪽에서 이런 사례들이 얼른 눈에 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등등. 아름다움이> 페널티킥> 나는> 참을>
세 번째 유형에 제일 끌린다. 유일무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예술가가 예술가인 이유는 단독성에 대한 확신과 야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창작물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면, 이름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것이어야 한다. 어떤 영화감독들이 널리 알려진 고전의 제목을 얄팍한 발상으로 재활용할 때, 또 대중가요 작사가가 모든 영어 단어는 다 제목이 될 가치가 있다는 듯이 무신경한 제목을 붙일 때, 그 창작자들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제목만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홍상수 감독은 유쾌한 사례다. 그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존 치버), <생활의 발견> (임어당),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아라공)처럼 창의적으로 인용을 하거나, <강원도의 힘> <오, 수정!> <옥희의 영화> 처럼 뜬금없는 고유명사로 의외의 효과를 거둘 때에도 좋았지만, 아마도 가장 멋진 사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 것 같다. 제목이 될 수 없을 것 같던 진부한 어구가 가장 독창적인 제목이 되어버리는 이 반전과 낙차가 핵심이다. 그의 기발한 제목들은 그의 영화적 개성과 잘 어울린다. 잘> 옥희의> 오,> 강원도의> 여자는> 생활의> 돼지가>
제목이 중요한 것은 예술에서만은 아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백만 민란 프로젝트> 의 경우가 그렇다. 그 절박한 취지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그 제목만큼은 안타깝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죽창을 든 '민란'이 아니라 차라리 스마트폰을 든 '축제'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일 텐데 이 운동의 제목은 우리를 과거로 끌어당긴다. 즐거운 유혹이 아니라 까마득한 노스탤지어로 젊은 세대를 움직일 수 있을까. 혁명가의 비장함보다는 예술가의 기발함이 더 필요해 보인다. 백만>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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