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일 옅은 안개가 도심을 감쌌던 지난 7일. 아침부터 ‘조금은 짙은’ 피부색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대부분 ‘구릿빛’ 얼굴을 한 아빠들의 손을 잡고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건물에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이주여성의 친정 방문 뒷얘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이주여성들에겐 한국의 가족들과 함께 한 감동의 첫 친정 방문 보고대회인 셈이다.
삼성생명이 2007년부터 한국여성재단과 함께 진행중인 ‘결혼이주여성 모국방문 지원사업’(일명 ‘날(NAL)자’ 프로젝트)에 올해는 베트남 출신 여성 30명이 선발돼 가족 72명과 함께 8월 7~14일 고향을 다녀왔다. 3개월 전 함께 찍었던 영상이 단상 앞 화면에 흐르고 가족마다 돌아가면서 당시의 벅찬 감동을 적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가슴 벅찼던 귀향
현장에서 만난 ‘결혼 6년차 국제 주부’투김화(26)씨는 아직도 친정 방문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2004년 7월 결혼과 함께 한국에 온 그녀에게 친정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홀로 남기고 떠나 온 어머니도, 경황이 없어 출국 전 미처 찾아보지 못했던 아버지(2000년 사망)의 산소도, 3월 소식으로만 전해 들은 동생의 결혼식도 늘 가슴에 사무쳤다.
하지만 매일 새벽 두시 반이면 일을 나서는 환경미화원 남편, 2년 전부터 당뇨합병증으로 투병중인 시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맏며느리의 짐은 무거웠다. 빠듯한 집안 형편까지 제쳐두고 “친정에 다녀오겠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는 금기(禁忌)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받아든 고국방문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당장 친정엄마 선물과 영양제부터 샀다. 6년 만에 찾은 호치민의 친정집. 세월만큼 엄마는 많이 늙고 야위었지만 어렸던 동생들은 그만큼 부쩍 자랐다. 케이크를 사 그 동안 건너 뛰었던 엄마 생일파티도 해 드리고 마을 잔치도 열었다. 투김화씨는 “오랜만에 맛본 엄마의 베트남 음식이 너무 맛있었지만 일주일쯤 지나니 한국음식이 그립더라”며 “나도 어느새 한국사람이 다 된 것 같다”고 웃었다.
친정 방문은 ‘시집 온 딸’만을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투김화씨와 함께 다녀 온 남편과 아이도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전보다 훨씬 아내와 엄마의 나라를 알고 싶어 한단다. 남편은 귀국하자마자 매 주말마다 베트남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베트남어로 ‘엄마 보고싶어’(씬 짜오 마)가 뭐냐고 묻더니 얼마 전엔 ‘사랑해’(안 위에 앰)를 묻더라”라고 투김화씨는 귀띔했다. 평소 감정 표현에 인색했던 남편이 장모와 통화할 때 직접 말하기 위해서란다. 요즘은 딸 지연이도 외할머니와 통화 때 엄마의 통역 없이 직접 대화하고 싶다며 베트남어를 가르쳐달라고 성화다.
부티민응엣씨는 무려 16년 만에 베트남을 찾았다. 94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6년 지금의 남편을 만난 그녀는 베트남에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부모님과 살고 있다. 4세 때 헤어진 딸이 22세의 어엿한 아가씨가 된 모습을 본 감동은 무슨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형편이 나아지면 부모님을 한국에 초청해 구경도 시켜드리자고 약속했지만 맞벌이를 하는 어려운 형편에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며 “연세 많으신 부모님을 더 늦기 전에 만나게 돼 너무 기뻤다”고 회상했다.
8월 한국일보의 ‘다문화 시리즈’를 통해 소개됐던 팜티신(36)씨의 남편 강진구씨는 “출산 후 앓고 있는 혈소판감소증으로 1주일에 한 번씩 수혈을 받던 아내가 고향 방문 후 심적인 안정을 얻어서인지 2주일에 한 번으로 수혈 횟수도 줄었다”고 고마워 했다.
재회, 그 이상의 의미
벌써 4년째 진행 중인 행사지만 매번 방문 때마다 안타까운 사연들도 끊이지 않는다. 최소 3년 이상 고국방문을 하지 못했거나 경제적 여유가 적은 가정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다 보니 올해도 신청서를 낸 173가족 가운데 143가족은 혜택을 얻지 못했다.
막상 선발되고도 고국 방문을 떠나기 직전까지 가슴 졸인 가족도 많았다. 한 가족은 임금이 몇 달째 밀려 여행경비와 처가에 가져갈 선물비가 없어 출국 이틀 전까지 방문을 망설였다. 또 다른 가족은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어렵게 모은 돈을 모두 소진해 빈손으로 고향 가족을 찾을 처지에 놓이자 ‘가네, 마네’ 하며 실랑이를 벌이다 비행기 이륙 직전에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장기간 여행이 어려운 장애인 남편 때문에 속을 태우다 여성재단의 특별 지원으로 천신만고 끝에 남편 친구를 도우미로 동행시킨 가족도 있었다.
하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호치민(21가족)과 하노이(9가족) 지역 친정ㆍ처가ㆍ외가를 다녀온 30가족에게는 단지 여행경비 액수로 가늠할 수 없는 값진 변화가 생겼다. 여성재단 강경희 사무총장은 “여행 기간 내내 아내의 도움 없이는 한 마디도 대화하기 어려웠던 남편, 낯선 음식에 어쩔 줄 몰라하던 식구들의 ‘역지사지’(易地思之) 경험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며 “가족들의 친정 공동방문은 한국에서 며느리이자 아내, 엄마로 살면서 남모르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주여성들에 대한 가족 내 이해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삼성생명의 사회공헌 사업
1995년 단일 기업 최초로 사회공헌 전담부서를 만든 삼성생명은 여성을 테마로 하는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으로 유명하다. 홀로 가족을 부양하는 여성에게 창업자금과 경영 컨설팅을 무료로 지원하는 ‘여성가장 창업지원’ 사업과 임직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의 소망을 이뤄주는 ‘엄마의 소망램프’ 사업이 대표적인 여성 테마 사업이다.
이에 더해 2007년부터 한국여성재단과 함께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고향방문을 돕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자 타국살이로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돕자는 취지에서다.
이 사업은 ‘날(NAL)자 프로젝트’로도 불린다. NAL은 ‘Now the Answer is Love’(이제 사랑이 해답입니다)의 약자로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이를 극복하자는 국제결혼 가정의 가족애를 표현한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이주여성들의 고향방문을 돕는 사업은 농협,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간간이 이뤄지고 있지만 이를 대규모로 정례화한 것은 삼성생명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사업은 이주여성은 물론 가족들도 함께 참여해 현지에서 다문화를 체험하고 비슷한 조건에 있는 가족들 간의 이해를 도모하는 등 내용적으로도 다른 모국 방문사업과는 차별화된다”고 강조했다.
최소 3년 이상 고향을 방문하지 못한 이주여성이면 신청이 가능하다. 신청자 가운데 공모를 통해 선발된다. 지난 4년간 몽골,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 4개국 출신 이주여성 440명이 ‘친정 방문’ 혜택을 받았다.
고향을 다녀 온 참가자들은 감사편지 등을 통해 “친정 가족들과 불가피하게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한국의 가족들도 다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등의 소감을 삼성생명에 전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앞으로 친정방문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주고 가족간 친교와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가족 구성원들이 다각적으로 아내, 엄마 나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생명 사회공헌활동 책임자인 홍종범 라인장은 “이 사업은 남편과 자녀에게도 이주여성의 환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1회성 이벤트가 아닌 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서 당당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삼성생명은 앞으로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다문화가족지원 자원봉사활동을 확대해 다문화사업 지원의 실효성을 높여나가기로 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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