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대표팀의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작전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시안게임 개막 직전인 지난 8일 중국 상하이 한국문화원에서 벌어진 제15회 LG배 세계기왕전 본선 8강전에 출전한 이창호 최철한 안조영 등 한국선수 전원이 중국선수에 패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이로써 올해 LG배는 중국선수 4명이 준결승전을 벌여 전기 우승자 콩지에와 조선족 신예기사 파오원야오가 결승에 진출했다.
한국바둑이 세계대회 4강에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후지쯔배를 비롯, 춘란배 도요타덴소배 등 외국 주최 기전에서 몇 차례 4강 진출에 실패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국이 주최한 세계대회서 ‘주인’ 없이 ‘객’ 들로만 4강 멤버가 채워진 건 사상 처음이다. 삼성화재배 15년, LG배 14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LG배 8강전이 상하이에서 열린 건 지난 2003년 8회 대회 이후 처음인데 당시에는 이창호 목진석 원성진 조한승이 4강을 싹쓸이했다. 7년만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이뿐 아니다. 지난달에 열린 삼성화재배서도 이창호 최철한이 일찌감치 16강전에서 탈락했고 이세돌은 8강, 박정환은 4강전에서 물러났다. 아시안게임 바둑종목 경기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국가대표선수들이 기대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어 양재호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탭이 애를 태우고 있다.
대표선수들의 부진은 최근 랭킹 변화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이세돌 홀로 올해 통산승률 86%로 9개월째 1위를 지키며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을 뿐 이창호 최철한 강동윤 조한승 모두 순위가 내려갔다.
특히 한국선수단의 대들보 역할을 해야 할 이창호의 부진이 무척 심각하다. 이창호는 9월 중순 이후 치른 10번의 대국에서 겨우 두 번 이기고 무려 여덟 번을 졌다. 천하의 돌부처도 이럴 때가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결혼하면 좀 나아지려나 기대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가진 첫 시합인 LG배 8강전에서 중국의 왕야오에게 완패했다. 올해 통산성적이 39승30패로 승률이 57% 밖에 안 된다. 그러다 보니 11월 랭킹에서 무려 6위까지 추락했다. 이창호의 프로생활 25년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다.
최철한은 올해 성적이 51승18패(승률 74%)로 그다지 나쁘지 않지만 최근 10경기 성적은 6승4패에 그쳤다. 최철한은 특히 콩지에 씨에허 등 중국기사들과의 대결에서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강동윤과 박정환도 마찬가지. 둘다 최근 10경기 성적이 6승4패로 역시 자신의 통산승률에 못 미친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컨디션이 상승세를 타야 하는데 반대로 최근 들어 성적이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다. 군 복무 중인 조한승은 최근 10경기 성적이 4승6패로 저조한 데다 올 들어 총대국수가 14판 밖에 안 돼 실전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게 문제다.
오히려 여자기사들은 컨디션이 괜찮은 편이다. 최근 3개월 동안 성적이 김윤영 7승3패, 이슬아 7승5패, 조혜연 5승3패, 이민진 2승3패다. 양재호 대표팀 감독도 “여자기사들이 그 동안 열심히 훈련을 해서 기량이 무척 향상됐다.”며 상당한 기대감을 보였다. 하지만 여자선수들 역시 최근에 끝난 정관장배 대표선발전에서 한 명도 대표로 뽑히지 못했다.
바둑 대표팀이 대외적으로 내세운 아시안게임 메달 획득 목표는 금 둘, 은 하나다. 하지만 과연 한국팀이 이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오리무중이다. 바둑계로서는 이번 아시안게임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기대했던 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바둑이 확실히 체육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제2의 중흥기를 맞을 수 있지만 반대로 노메달에 그칠 경우 바둑이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에 한국 바둑사상 최초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후 1년 내내 우리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만 생각하며 지냈다는 양재호 감독은 아시안게임 개막일인 12일 오전 선수들을 모두 소집해서 전체모임을 갖고 다시 한 번 필승을 다짐했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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