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주(1774~1842)는 19세기 초반을 살다간 학자이다. 왠지 19세기 초 조선사회는 어두운 시대의 서막으로 느껴진다. 정치적으로 세도정치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경제적으로도 탐관오리의 수탈이 끊이질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는 민란의 동요가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이보다 심각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홍석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정의가 있겠는가, 모든 건 운명일 뿐이라며 장탄식을 쏟아내고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이러한 운명조차 무시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말라는 논리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홍석주는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태로운 바라고 주장했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무작정 기댈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운명이 무슨 소용이냐며 옳지 못한 행위마저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진정한 운명이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의롭다 하고, 꼭 그렇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그리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성인(聖人)은 옳은 일을 행할 뿐인데 그 결과 또한 자연스레 좋다. 성인의 모든 행동은 시작부터 의롭고 결과가 운명적으로 그에 상응한다. 군자는 어떠한가? 그는 애써 옳은 일을 행함으로써 그 결과가 정의롭기를 바란다. 그는 성인 정도는 아니어서 의로운 일을 힘써 행하지만 항상 그 결과가 어떨지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결과가 올바르기를 기대하는 자이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의 경우는 어떤가? 보통 이상의 사람들은 단지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가 나쁘면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반대로 동기가 좋지 않았는데도 그 결과가 바라는 대로였다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경우가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에 옳고 그름은 물론이거니와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살면서 전연 반성하지 않는다.
홍석주는 그저 모든 것을 운명으로 치부하거나 운명을 무시한 채 나쁜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재차 경고했다. 세상에는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의 웃음을 지으며 부귀를 취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옳은 일을 하려다가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는 자가 늘 가난한 것만은 아니며 아첨하는 자가 영원히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운명이란 이처럼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안다면 특별히 운명에 대해 어떻게 해 보라고 하지 말 것이다. 이보다는 진실로 옳은 삶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옳은 삶이 무엇인지 구하지 않은 채 운명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운명이란 진정 옳은 바를 추구할 때만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운명이란 정해진 바대로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안다면 운명에 기대어 무언가를 바랄 필요가 없다. 일찍이 제갈량은 몸이 다하도록 옳은 일을 추구한 뒤에 그만둘 것이니, 일의 성공이나 결과의 이로움과 불리함은 미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 하였다. 한평생 옳은 일에 전념하였는데 그 결과 또한 의로울 때 이것이 운명이다. 진실로 정의롭지 않다면 운명이란 전연 쓸모가 없으며, 진실로 옳은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운명 또한 세상의 가르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작금에도 그저 운명에 몸을 맡기거나, 너무나 운명을 무시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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