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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0> 바다에서, 첫 다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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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10> 바다에서, 첫 다이빙

입력
2010.11.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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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첫 페이지가 전부다. 그렇듯이 무슨 일에서나 처음은 단서가 되고 동기가 되면서 일의 진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역사에서는 알파가 곧 오메가다.

그러기에 첫 시작은 열쇠다.

처음이란 것은 무슨 일에서나 그렇다. 첫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첫 마디는 결론을 미리 예비한다. 첫 걸음은 그 뒤의 모든 행적을 미리미리 진작 가늠하게 만든다. 처음은 무엇이나 그런 것이다. 작은 일이냐, 큰일이냐를 따져서 구별할 것 없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최초는 미리 전부를 내다보게 한다. 그리고는 첫 사랑이 영원하듯이, 무엇이든 처음은, 처음 해 본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사무치게 된다. 누구에게서나 그래서 무엇이든 간에 처음 해 본 일은 영원한 기념비가 될 수 있다. 두고, 두고 새기고 또 되새기게 될 것이다. 어느 것이나 첫 경험은 영원한 경험이 된다.

나에게서 첫 다이빙이란 것은 그래서 여간 소중한 게 아니다. 수영선수들이 풀을 향해서, 풍덩! 몸을 던지는 것을 다이빙이라고 한다. 영어로 다이브(dive)라고 하면, 뛰어 든다, 잠수(潛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비행기가 공중을 날다가 아래를 향해서 급강하하는 것도 가리키게 된다. 물론 하늘 높이 선회하던 제비가 파도를 향해서 내리꽂히다시피 나는 것도 역시 다이브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적에, 그러니까 1 학년 때의 일인데, 여름이면 부산의 송도 해수욕장에서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는 수영을 즐기곤 했다. 뿐만 아니다. 여름 방학을 앞둔 시기면, 방과 후에는 으레 학교 뒷산의 큰 저수지에 가서 수영을 하곤 했다.

그렇게 수영을 즐기면서 물에서 살다 보니, 그 때문에 내게 별명이 주어졌다. 일본말이 되어서 안 됐지만, 친구들은 나를 ‘갑파’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하동(河童)이라고 쓰는, 이 인간 모습을 갖춘 괴물은 이를테면 물귀신인 셈이다. 물에 사는 꼬마 물귀신인 셈이다.

나는 그 별명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는 친구들 앞에서 더러 더러 ‘갑파’ 흉내를 짓곤했다. 그건 여간한 자긍심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여름방학 내내 송도의 해수욕장에서 붙박이로 살다시피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수영을 곧잘 했다. 평영, 배영, 크롤 등등의 수영법을 능숙하게 해내었다. 2~3㎞에 걸쳐서 파도 가르면서 헤엄치는 원영(遠泳)도 예사로 해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수영 마라톤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야말로 명실 공히, 진짜로 ‘갑파’였던 셈이다. 드넓은 온 송도 바다는 우리 집 안뜰보다 더 편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다이빙이었다. 해수욕장에는 ‘다이빙 보드’가 있었다.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아래층에서 다이빙 하는 것쯤이야 그야말로 누워 떡 먹기였다. 언제든 개구리 못지않게 날렵하게 파도 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앞으로 쑥 뻗은 두 팔 끝과 머리가 거의 같은 순간에 첨벙! 하고 물에 잠기는 그 순간의 상쾌함이라니! 그러다가 반사적으로 파도 위로 몸이 솟구쳐 오르는 그 찰나의 쾌감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묵은 껍질 벗고 새 껍질 얻어서 재생하곤 하는 매미의 허물벗기가 이런가 싶어지기도 했었다.

한데 위층이 문제였다. 꽤나 높았다. 감히 거기서 다이빙을 해보려고, 보드 끝에 버티고 서 보곤 했지만, 다리가 떨려서 매번 그만 포기하곤 했다. 보드 바닥에서 물 바닥까지 높이가 사뭇 아스라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내려다보는 눈길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그래도 몇 차례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다리를 떨다 말고는 우줄우줄 아래층으로 계단을 밟고 내려서던 그 때의 심정이라니, 너무나 참혹했다. 누가 보았을까 봐 기가 질렸다. 영락없이, 무슨 패잔병 같은 꼬락서니였다.

그런 중에 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일단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데 웬 젊은 청년 한 사람하고 내 나이 또래의 여학생이 거기 나란히 서 있었다. 여학생이 보드를 휘청휘청 밟고는 끝으로 나아갔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두 팔 앞으로 쑥 내밀더니, 이내 풍덩!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다. 정말이지 날쌘 제비 같았다. 날렵하고 상쾌하기가 거짓말 같았다.

여학생은 이내 바다 위로 솟구치더니 크롤 영법(泳法)으로 마치 50㎙ 경영(競泳)이라도 하듯이 물살을 가르고는 헤엄쳐 나가는 게 아닌가! 영락없는 인어(人魚)였다. 이 못난이는 그걸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억울했다.

‘난 뭐야? 무슨 꼴이야?’

가슴을 치고 싶었다. 한숨을 토했다. 그걸 눈치 채었던지, 청년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너도 저러고 싶은 모양이구나, 저 아인 내 동생이야.”그러면서 이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보드 끝에 나가서 서. 그리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앞만 보아. 곧바로 먼 앞만 보란 말이야.”시키는 대로 한 나에게 그가 물었다.

“어? 저 먼 수평선 높이와 네 눈높이가 다른가?””아니요, 같은 데요.””같지. 한데 뭘 겁을 내. 마음 놓고 뛰어들어!”그 순간 나는 몸을 날렸다.

나의 최초의 다이빙다운 다이빙은 그래서 찬란했다. 그것은 무엇이든 마음먹기 나름이란 가르침으로 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내 머리에 간직되어 있다. 그것은 나의 내 나름의 유심론(唯心論), 이를테면 세상만사 마음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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