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주 화요일마다 사진기자 정범태(82) 선생이 ‘사진으로 본 한국현대사’를 연재합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당신이 밝힌 소회를 그대로 옮깁니다.
카메라를 붙들고 살아온 지 65년이 됐다. 1955년 10월 공채 전형으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진기자 발령을 받은 후, 1961년 한국일보 사진부로 자리를 옮겼고, 주간한국, 일간스포츠를 거쳐 86년 정년을 맞았다. 뒤로도 한국일보에서 계약직으로 3년을 더 근무했으니 근 26년을 한국일보 사진부기자로 보낸 셈이다. 사진기자로서 현장을 뛰며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 소망이 통했음인지 신생사인 세계일보에서 다시 카메라를 잡고 기자 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96년 거기서도 퇴사하며 언론인의 길을 접었으니 만 41년을 신문사에 몸 담고 역사 현장을 기록하게 됐다. 1956년 해공 신익희선생의 장례식 취재를 시작으로 고희의 나이에 천안문 사태와 중국 여순의 안중근의사 순국유적지까지 취재를 마쳤다. 해방 이후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은 대부분 나의 카메라에 담겼을 것이다.
수많은 현장의 기억들 가운데 1년 여의 옥고를 치르게 된 강화도 전등사 필화 사건은 나의 의식과 인생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1962년 4월 16일 한국일보 3면에는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아래와 같은 톱기사가 실렸다.
“맑은 봄의 휴일을 즐기려 강화도까지 찾아갔던 상춘의 나그네들은 그 고장 폭력배들의 훼방으로 모처럼 마음먹고 나선 봄놀이길을 잡치고 돌아왔다. 15일 강화도 전등사 주변에는 서울로부터 200여 명의 소풍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자리를 펴고 앉는 곳곳마다 그 고장에서 판을 친다는 5,6명의 폭력배들이 뛰어들어 음식을 가로채 먹고 술은 빼앗아 먹으면서 욕지거리를 퍼붓고 훼방을 놓는 바람에 마음먹고 나선 봄놀이 대신 싸움판만 벌이다가 모두 쫓겨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강화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진 모씨를 우두머리로 하는 그들 폭력배 5,6명은 우리 한국사람들의 봄놀이 판에만 뛰어들어 훼방을 한 것이 아니라 이 날 전등사를 찾아와 술을 마시고 있는 미군들 틈에까지 뛰어들어가 멱살을 잡고 싸웠다. 이 난장판 바람에 소풍객들은 흥을 잃고 쫓겨났는데 진 모씨 등 일당의 행패는 이 날 처음 비롯된 것이 아니고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왕왕 있었다는 그 고장 사람들의 얘기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인 17일, 회사에 출근해 자리에 앉아 있는데 후배기자를 따라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사진부로 들어서며 나를 찾았다. “정범태 차장님 맞으시죠?” “예. 무슨 일이시죠?” “치안본부에서 왔습니다.” 방문객이 신분증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전등사 기사에 대해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나는 약간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불쾌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신문에 난 그대로요. 뭐 문제가 있습니까?” 사내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게 있는데 협조 좀 해 주시겠습니까?” 조용하던 편집국에 큰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주변의 동료 기자들이 하나 둘 내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구야! 누군데 겁도 없이 신문사 편집국에서 소란을 피워!”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편집국이 술렁거리자 사내가 일단 꼬리를 내렸다. “좀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나는 구내식당으로 그를 안내했다. “자, 무슨 얘긴지 말해보시오.” “신문에 난 게 모두 사실입니까?” “아니 그럼 사실도 아닌 사진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쓴단 말이오?” 경찰은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듯 했다. “그런걸 봤으면 타일러서 보내거나 신고를 하면 되지. 꼭 그렇게 대서특필할 필요가 있었나요?” “이거 보세요. 신문기자는 사실을 기록해서 보도하는 사람입니다. 크게 쓰고 적게 쓰고는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편집국장 및 전체가 결정하는 겁니다.” 경찰 수사관은 잠깐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향과 신문사 입사를 묻고는 돌아갔다.
찜찜하게 이틀을 보내고 난 오후, 편집국으로 다시 찾아온 수사관은 단호한 눈빛으로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치안본부로 좀 가셔야겠습니다.” 당황한 내가 홍승면 편집국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홍국장은 “별일 아닐 거야. 다녀오게”라고만 했다. 신문사 앞에 세워진 검은 지프차를 타고 을지로 치안본부까지 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건이 그렇게 커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취조는 자정이 넘도록 계속됐다. “전등사 사건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군인들이 음식이나 술을 갈취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조서가 작성되고 다시 찢는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과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경찰 조서에는 기자라는 영웅심이 발동해 결국 적을 이롭게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요? 난 지장을 찍을 수가 없소!” 하지만 이미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자포자기에 이른 것이다. 영장이 떨어질 테니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수사관은 방을 떠났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불현듯 집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가 생각나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치가 떨렸다. ‘군인 놈들이 혁명인가 뭔가를 저지르더니 결국 언론탄압을 실시하는군! 내가 보도한 사진이 군인들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불신을 조장한다고 몰아간다 이거지. 나쁜 놈들….’
결국 새벽 2시가 넘어 영장이 떨어지고 내 손목엔 수갑이 채워졌다. 그날 새벽 5시경 ‘반공법과 특례법 3조’에 저촉된다는 죄명으로 치안본부에서 중부경찰서 유치장으로 향했다. 유치장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정신을 차려보니 저 한구석에서 “이욕우!”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욕우’라니? 가만 생각하니 무식한 형사 놈이 한국일보 사회부장인 이목우(李沐雨)를 한자를 잘못 읽어 가운데 ‘목’자를 ‘욕’으로 부른 거였다. 이목우 사회부장도 구속돼 끌려온 것이다. 강화도 사건은 본질과 관계없이 이렇게 확대되고 있었다. 군사정부에게 이 사건의 본질은 그들이 최대 치적으로 내세운 ‘폭력배 일소’에 흠집이 났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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