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년 정언 홍중효는 영조에게 현감을 지냈던 엄택주를 처벌할 것을 요청한다. 홍중효의 말에 의하면 엄택주는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이만강(李萬江)이었다. 아버지는 전의현(全義縣) 지인(知印)이었고, 그 역시 지인을 지냈다고 한다. 지인은 지방 관청의 인장을 관리하는 아전, 곧 향리다.
아전은 백성들로부터는 양반을 대리하여 자신들을 착취하는 존재로, 양반들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명령을 따르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속이는 그런 존재로 인식되었다. 어느 쪽이나 달가울 것이 없는 존재였다. 지금도 향리, 아전이라 하면 부정적 인식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분제 불평등 사회에 항변
하지만 아전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백성을 쥐어짜는 것은 양반의 명을 따라 하는, 양반을 대리하는 행위일 뿐이다. 아전 노릇 역시 양반체제의 강요에 의해 하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아전은 한번 아전이면 영원한 아전이다.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양반이 하는 그 좋다는 벼슬길로는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엄택주는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2학년 나이인 열 서넛 살에 고향에서 달아난다. 아전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과연 성과 이름을 바꾸고 과거에 응시해 합격하고, 현감까지 지낸다. 하지만 그것은 곧 범죄가 되었다. 홍중효는 엄택주가 본래의 이름 이만강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사용한 것과, 고향에 살고 있는 동생과 내왕을 끊고 부모의 무덤에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을 이유로 처벌을 요청했다.
홍중효의 말을 들은 영조는 어려서 다른 사람에게 양육되어 본래 성을 잃은 경우도 장성하면 관청에 요청하여 본래 성을 찾는데, 이만강은 고의로 자기 성을 버린 경우라 하여 형조에서 세 차례 엄하게 형벌을 가한 뒤 흑산도에 귀양을 보내어 영원히 노비로 삼고,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라고 명한다.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가부장적 사회이고, 가부장제는 성씨와 본관을 공유하는 친족 집단으로 구체화된다. 이런 사회에서 성을 바꾼 것은, 인간의 윤리를 저버린 범죄가 되는 것이다.
이만강 사건은 이로써 끝나지 않았다. 이만강은 이듬해 흑산도를 탈출하여 서울을 드나들다가 다시 잡혀 갔고, 10년 뒤인 1755년에는 나주 괘서(掛書)사건을 일으킨 윤지(尹志)의 역모 사건에 관련되어 문초를 받다가 고문으로 사망한다. 죄인 이만강의 속내는 이 문초 기록에서 겨우 한 마디 남는다. "신은 문예의 재주가 조금 있었지만, 큰 죄에 빠져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먼 바다의 섬으로 귀양을 갔기 때문에 원한이 가슴 속에 가득했습니다."
아전인 주제에 '문예의 재주'를 가진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알다시피 조선사회는 신분제 사회다. 아전은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나더라도 그 재능을 꽃 피울 수 없다. 이만강이 성씨를 바꾸고, 동생을 만나지 않고, 부모의 무덤을 찾지 않은 것은, 그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항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죄가 될 뿐이었다. 그 누구도 죄를 저지르게 한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예외적 계층 이동에 열광
얼마 전 슈퍼스타K에서 무명의 젊은이가 스타가 되는 것을 보고 엉뚱하게도 이만강이 떠올랐다. 물론 그 젊은이는 만인의 찬사를 받아서 스타가 되었으니, 이름을 바꾸어 벼슬길에 올랐던 이만강과는 결코 같지 않다. 하지만 슈퍼스타K의 스타 탄생이 실로 드문 예외적인 기회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예외적 기회에서의 스타 탄생은, 계층간의 이동성이 극히 낮은 대한민국 사회를 배경으로 삼기에 유의미한 것이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사회는 신분제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을 봉쇄하던 조선사회와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스타가 된 젊은이를 축하하면서 한편으로 이 시대의 수많은 이만강을 생각해 본다. 이만강이 없는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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