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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씨앗도 철새처럼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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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씨앗도 철새처럼 날아간다

입력
2010.11.0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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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이란 이름으로 시인과 가수가 모여 '시(詩)노래'라는 아름다운 콘서트를 가지는데, 무대에 올라서서 시 한 편 달랑 읽고 내려오기 멋쩍어 준비한 것이 박주가리 씨앗이었다. 박주가리는 여러해살이 덩굴풀이다. 여름에 꽃이 피고 가을에 타원형의 씨앗주머니가 익는데, 씨앗이 바람에 날려갈 때쯤이면 씨앗주머니째로 따다가 투명 비닐 지퍼백 속에 모아 놓았다.

나팔꽃 콘서트가 있는 날 박주가리 씨앗주머니 하나를 가져가 씨앗을 관중에게 힘차게 불어주었다. 그 씨앗주머니 속에 수북한 씨앗은 크기 6~8㎜의 달걀이 거꾸로 된 모양이고, 그 위에 명주실 같은 하얀 털이 수북하게 달려 있다. 옛사람들은 그 하얀 털로 인주를 만들었다.

박주가리의 꽃말이 '먼 여행' 이라는 것 등을 알려준 뒤 관객들을 향해 박주가리 씨앗을 입바람으로 낙하산마냥 날려 보내 요란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게 나에게는 박수였지만 박주가리에겐 죽음이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꽃말이 먼 여행이듯 바람이 불면 은빛 낙하산을 타고 새싹을 피우기 위해 멀리멀리 날아가야 하는데 나는 공연장 싸늘한 시멘트 바닥에서 그 씨앗들을 죽여버린 것이다. 행여 은현리를 지나다 박주가리 씨앗주머니를 보아도 당신은 그냥 지나치시길. 아무리 하찮은 풀이라도 11월에 철새처럼 먼 여행을 떠나야 할 씨앗도 있기 때문이다. 그 씨앗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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