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년 전만 해도 일본 여행 후 “일본 라면은 맛이 없다, 절대 먹지 말아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먹는 라면을 생각하고 주문했다가 기름진 돼지고기가 떡 얹힌 느끼한 라멘(라면의 일본식 발음)에 충격이 적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 “라면 먹자”는 말은 라멘을 가리킬 만큼 돼지육수와 생면 맛이 한국인의 혀를 파고들고 있다.
라멘집들이 늘어나면서 라멘맛들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홍대 앞에는 하카타분코 산쵸메 나고미 멘야도쿄 라멘81번옥 사가라멘 오네상라멘 등 10여개의 일본 라면집들이 몰려 있는데 라멘족들은 성지순례하듯 찾아다니며 맛을 비교하기도 한다. 라멘 맛은 크게는 한국식으로 변형해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업체들과, 일본에서 먹을 수 있는 그 맛 그대로를 재현하면서 마니아층에게 어필하는 곳으로 나뉜다. 주요 프랜차이즈 라멘 브랜드는 하꼬야, 멘무샤, 라멘만땅 등으로 각 50~10여개의 가맹점을 갖고 있다. 라멘의 맛을 집중 해부해 본다.
일본 지역마다 라멘도 특성화
중국의 라미엔(拉麵)에서 유래한 라멘은 2차 대전 이후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지금은 일본인 누구나 즐겨먹는 대표적인 대중음식이다. 워낙 즐겨 먹다 보니 지역마다 특징이 다르고, 독특한 조리법과 맛으로 이름난 명가도 많다.
라멘 하면 먼저 떠오르는 돈코츠라멘은 일본의 가장 남쪽 섬인 큐슈지방에서 많이 먹는 라멘 종류다. 돼지뼈를 우려낸 국물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고 국물까지 훌훌 들이마시면 마치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난 것처럼 든든해진다. 큐슈의 북단 후쿠오카현부터 남단 가고시마현까지 많은 돈코츠라멘집이 있는데 큐슈 내에서도 지역마다 육수 농도가 다르다. 남쪽으로 갈수록 진해져 가고시마에선 끈적할 정도의 진한 국물을 맛볼 수 있다. 돼지뼈를 넣고 곤 육수에 계속 물과 뼈를 첨가해가며 육수를 졸여 맛이 강하다. 하카타분코나 사가라멘의 이름이 바로 이 지방의 지명 하카타(博多), 사가(佐賀)를 딴 것. 당연 돈코츠라멘이 대표 메뉴다. 나가사키도 큐슈에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해물을 넣은 나가사키짬뽕으로 유명하다.
북쪽 섬 홋카이도에서도 라멘을 많이 먹는다. 삿포로에서 유명한 미소라멘은 돼지뼈가 아닌 생선뼈 등 해물로 국물을 내고 일본된장을 넣어 부드러우며 감칠맛 나는 국물이 일품이다.
일본의 중심 혼슈섬 도쿄에서는 보다 담백한 쇼유라멘이나 시오라멘을 먹는다. 닭이나 해물로 낸 맑은 국물에 간장으로 간을 한 것이 쇼유, 소금 간을 한 것이 시오다. 아카사카에서는 다진 돼지고기를 넣은 탄탄멘을 먹는다.
한국에선 누린내 없애기 전쟁
2007년 라멘만땅이 처음으로 라멘 프랜차이즈를 시작한 이후 업체들은 돼지 누린내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마니아층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라멘을 선보이려면 거부감이 심한 돼지냄새를 없애야 했다. 라멘만땅의 강승천 메뉴개발팀장은 “일본에서 많이 쓰는 돼지족뼈 대신 냄새가 덜한 등뼈를 쓰고, 닭발 육수를 추가했으며, 마늘 생강 양파 등으로 누린내를 잡았다”고 설명한다. 멘무샤 역시 돼지뼈 육수에 소사골 국물과 닭뼈 육수를 섞고 한약재를 넣어서 냄새를 없앴다. 결국 이러한 프랜차이즈 업체의 라멘 국물은 돼지육수라는 느낌이 거의 안 날 정도로 순하다. 삶은 돼지고기 고명(차슈)이 얹혀 있다는 점이 라멘의 정체성을 천명하고 있다. 또한 지역별 대표 메뉴인 돈코츠, 쇼유, 미소, 나가사키짬뽕, 탄탄멘 등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도 프랜차이즈 라멘집의 공통점이다.
일본 라멘 한국화의 또 다른 특징은 매운 맛을 가미한 것. 원래 나가사키짬뽕은 해물이 들어갔을 뿐, 맵지 않은 흰 국물의 라멘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먹는 나가사키짬뽕은 고춧가루와 청양고추 등을 넣어 매콤하다. 매운 라멘이 우리 입맛을 사로잡는 것은 당연하다. 멘무샤가 전국 매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인기 메뉴를 조사했을 때 1위로 집계된 것이 나가사키짬뽕이었다.
고난이도 정통 라멘 맛
일본 라멘을 즐기는 층은 이러한 프랜차이즈보다는 일본 현지맛에 가까운 라멘집을, 그것도 돼지기름 그득한 돈코츠만 찾는다. 술 마신 다음날 꼭 라멘집을 찾는다는 회사원 박모(38)씨는 “걸쭉한 돼지국물 맛은 먹을수록 중독되는 느낌”이라며 “너무 한국화한 라멘집은 안 가게 된다”고 말한다.
현지 맛에 가까운 것으로 이름난 곳이 홍대앞 하카타분코, 나고미, 건국대 인근 우마이도, 대학로와 홍대앞 등에 7개 매장을 둔 사가라멘 등이다. 하카타분코 나고미 우마이도 모두 돈코츠라멘만 파는 전문점으로 돼지기름과 냄새를 숨김 없이, 자신 있게 드러낸다. 일본인들이 찾아오고,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인기지만 처음 먹어본다면 과한 도전일 수 있다. 모두 면을 직접 뽑아 만든다. 각각의 차이점이라면 하카타분코는 국물이 좀 짜고, 나고미는 돼지 냄새가 유독 강하며, 우마이도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사가라멘은 위 곳들과 달리 하카타식이 아닌 사가식 라멘을 선보이는데, 국물은 진하지만 의외로 돼지냄새는 안 나고 고소하다. 오중열 사장은 “가장 콜라겐이 많은 부위인 돼지무릎뼈와 돼지머리를 넣고 뼈를 뒤집어가며 국물이 3분의 1로 줄 때까지 고아 진한 국물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특별한 재료를 넣지 않고도 느끼하지 않은 것은 초벌로 뼈를 삶아내 돼지 피와 냄새를 제거하기 때문. 간장과 맛술 등을 넣고 졸인 삼겹살 차슈도 고소함을 더한다. 오 사장은 “돈코츠라멘은 면 속으로 국물이 스며들지 않은 상태로, 뜨거울 때 빨리 먹어야 제맛”이라고 말했다.
돼지육수의 농도가 정통 라멘 맛을 내는 데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간을 맞추는 간장이야말로 미묘한 국물맛을 좌우한다. 대부분 일본 간장을 수입해 쓴다.
일본 현지 라멘도 한국화 바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본 현지 라멘에서 발견되는 한국 음식의 영향이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많이 먹지 않던 마늘을 즐기는 것을 비롯해, 마늘 라멘 메뉴가 인기를 끌고, 최근 웬만한 라멘 집이면 김치 라멘을 파는 등 한식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하카타분코와 우마이도에서 취향에 따라 손님이 직접 마늘을 찧어 넣을 수 있도록 한 것도 일본 현지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마늘을 넣으면 진한 돼지육수도 맛이 개운해진다. 국물에 마늘기름과 구운 편마늘을 넣은 라멘은 최근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라멘으로 손꼽힌다.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해 멘뮤샤가 내놓은 메뉴가 쿠로마유돈코츠라멘으로, 구운 마늘을 넣어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돼지육수 맛을 압도한다. 중국에서 발원해 일본에서 대중화한 라멘이 동북아시아의 대중이 모두 사랑하는 면 음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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