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로 날아오는 편지는 간이 맞지 않은 싱거운 음식 같다. 받는 이는 쓴 사람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사연을 대충대충 읽고 만다. 인터넷 시대, 다들 편지에 건성이 되어 버렸다. 영혼을 울리는 편지를 받아본 적도 오래고, 그런 편지를 써본 지는 더욱 오래다. 차라리 백지 편지를 보내고 백지 답장이라도 받고 싶다.
연애 시절에 누군가에게 백지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백지 편지를 읽어내기가 너무 막막하여 나도 백지 답장을 보냈더니 그 뒤론 연락이 뚝 끊어져 버렸다. 양산 통도사에 주석했던 경봉(1892~1982) 선사께서 우리나라 큰 스님들과 주고받은 서한을 정리하는데 말석에 참여한 적이 있다.
고승들의 서한에서는 칼 소리가 나고 피가 튀는 것 같았다. 한 번은 경봉 선사께 편지가 왔는데 겉봉에는 切回答要望(절회답요망), 간절히 화답을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개봉해보니 백지 한 장만 달랑 들어있었다. 그 백지를 보고 경봉 선사는 '백지가 큰 무쇠솥 같아서 입을 댈 수가 없다.
입을 대면 타버린다'며 답장을 보냈는데, 백지조차 넣지 않고 주소 위에 흑점만 찍어 보냈다. 무서운 편지에 더 무서운 답장이 간 것이다. 가끔은 치열하게, 절실하게 편지를 쓰고 싶다. 그런 편지를 받고 싶다. 편지로 백지 한 장을 보내 놓고 어떤 답장이 올지 기다려보고 싶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