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금(54)씨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상처투성이다. 11남매 중 셋째인 그는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늘 헐벗고 굶주렸다. 경남 밀양에서 초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학교에 가려고 보면 신고 나갈 신발이 없을 정도였고, 학교 마치고 오면 동생들을 업어 키우는 게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운동장에 꿇어앉아 있기 일쑤였고 제대로 먹지 못해 창자가 꼬여 큰 일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 같은 유년시절을 보낸 그가 3일 고려대학교 발전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25년간 고려대 인근에서 하숙집을 운영해 온 그가 5년 전부터 꼬박꼬박 모은 돈이다. 그는 “가정형편 탓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77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야간 낚시터를 돌며 라면과 밥을 팔고 재래시장에서 국수를 삶아 팔기도 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아들(유성재ㆍ33)이 어렸을 때 ‘떡볶이 장사하면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는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방 7칸짜리 건물 세를 얻어 하숙생 10명으로 시작한 게 1985년.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살펴 주고 싶기도 했지만 밥은 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세를 얻는 건물이 팔려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는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싶어 빚을 내 건물을 올렸다. 이자를 갚느라 하숙에 남의 집 아기를 돌보는 일까지 했다. 하숙생을 치르느라 아들 성재씨는 6년여간 주방에서 지냈다. “늘 미안했는데 군에 있을 때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 존경한다’는 편지를 받고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돌본 하숙생이 1,000여 명. 사법시험 합격자만 200~300명 될 거란 게 그의 설명이다. 다들 아들 딸 같다는 그에게도 특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을 터. “경영대에 다닌 친구였는데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속 많이 끓였다”며 “공인회계사시험(CPA)에 합격해 첫 월급을 탔다며 과일바구니를 들고 왔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그가 아들 딸이라 부르는 하숙생들의 칭찬도 그칠 줄 모른다.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는 직접 깨워도 주시고 신경 많이 써 주세요”(박준희ㆍ경영 3년) “밤에 간식도 챙겨주시고 집에서 지내는 것처럼 편해요”(박영채ㆍ한국사학 4년)
“낚시터 아줌마ㆍ국수 아줌마ㆍ하숙집 아줌마 OO아줌마란 이름으만 20여년간 살았는데 이제야 이름을 찾은 느낌”이라는 그는 “힘이 닿는 한 하숙집을 계속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는 이날 이기수 총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운초우선 교육관(사범대 교육관) 308호를 ‘유정 최필금 강의실’로 명명, 현판식을 가졌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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