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男중심 조직문화·경력단절 탓 "리더 꿈꾸기엔…"
유명 대기업에 다니던 김모(35)씨는 3개월 전 둘째를 낳으며 회사를 퇴직했다. 첫째는 시어머니가 맡아 줬지만 둘째까지 돌봐 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던 것. 7년이나 회사에 다녔고 내부에서도 일 잘하는 직원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론 첫째의 소극적 성격이 자기 탓인 것 같아 속앓이도 많았다. 아이를 돌보지도 않는 남편은 “애가 내성적인 건 어렸을 때 엄마와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김씨의 탓으로만 돌렸다.
한국에서 성 격차가 빠르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도 조직 내에서 여성이 리더가 되기는 어렵다. 조직 문화가 남성 위주인 데다 만성적 야근 등 장시간 노동으로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여건 때문에 여성들은 충분한 커리어를 쌓기도 전에 직장에서 사실상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주요 분야에서 여성 리더의 수가 순위를 크게 좌우하는 국제적 성평등 순위에서 한국은 만년 세계 최하위권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세계 134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달 발표한 ‘2010년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0.634로 104위를 기록했다. 관리직 여성공무원 임용 목표제, 국회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제 등을 통해 행정 부처의 중간관리직 여성과 여성 정치인 수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최고층은 거의 없다. 민간 기업도 이점에선 마찬가지다.
남성 위주의 조직 문화
삼성경제연구소가 9월 초 발표한 ‘대한민국 워킹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직장여성 중 ‘조직에서 높은 직급까지 승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은 21.8%에 불과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비율은 42.3%나 됐다.
그 이유에 대한 워킹맘 자신과 관리자들의 인식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일하는 엄마들은 무려 61.4%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이유로 들었지만 관리자들은 ‘출산 임신에 따른 경력 단절’(38%) ‘여성 스스로 낮은 목표 설정’(36.4%) 등을 꼽은 것. 예지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잦은 회식과 경직된 위계질서 등이 여성 리더의 성장을 막는다는 것이 여성들 자신의 생각인 반면, 대부분이 남성인 관리자들은 여성이 일보다 가정에 더 신경을 쓰고 야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양희 젠더앤리더십(양성평등 교육 기관) 대표는 “현재의 기업 조직은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를 부인으로 둔 남편들이 만든 것”이라며 “이런 조직 문화 속에서 여성이 리더로 성장하지 못하는 데 대해 ‘적응 못하는 여자가 문제’라고 반응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세계 최장 노동시간이 부른 경력 단절
수많은 여성들이 취업에 성공하고도 리더로 성장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출산 육아에 따른 경력 단절이다. 남자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역U자형(나이별)인 반면, 여성의 경우 M자형 곡선을 그린다. 이는 30대 초~중반 출산으로 육아 부담이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 특히 미혼일 때는 야근이나 회식도 마다 않다가 아이가 생긴 후 만성적 야근과 늦은 귀가에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김혜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가족정책센터장은 “가사와 육아를 남녀가 공유하지 않으면 영원히 남성은 돈 버는 기계로 내몰리고 여성은 ‘일보다 집이 우선’이라는 편견에 시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공직자 사회는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직장 안 유리천장은 모범이 돼야 할 정부 부처에서도 공공연하게 존재한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직 공무원 가운데 고위직(1ㆍ2급)의 여성 비율은 2.8%에 그쳤으며 관리직(1~4급)도 6.8%에 머물렀다. 지방직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고위직(1ㆍ2급)의 2.3%, 관리직의 8.1%(1~5급)만이 여성이다.
행정부 수장도 대부분 남자다. 16개의 중앙행정기관 가운데 현재 여성 장관이 있는 곳은 보건복지부와 여가부와 뿐이다.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여서 16개 광역자치단체장 가운데 여성은 한 명도 없으며, 228개 기초자치단체장 가운데 여성이 수장인 곳도 6곳(2.6%)에 불과하다.
한국의 현실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유엔개발계획(UNEP)이 발표한 2009 여성권한척도 조사 결과를 보면 정부의 관리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9% 이하인 나라는 한국 외에 카타르 오만 터키 아제르바이잔 알제리 예맨 파키스탄 등으로 이슬람 국가들밖에 없다.
그러나 공직에 진출하는 여성은 급격히 늘면서 고위직과 관리직 비율은 점차 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외무고시 행정고시 합격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각각 48.8%와 46.7%에 달했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관련 대책을 계속 내놓고 있다. 특히 여가부는 여성발전기본법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국회에 제출한다고 2일 밝혔다. 여성정책기본법으로 이름을 바꾼 개정안은 중앙행정기관에서만 운영되던 여성정책책임관 제도를 광역단체까지 확대하고, 공공기관장이 이사 임명 시 여성 참여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을 규정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노르웨이·핀란드서 배우자
노르웨이와 핀란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위한 지원책 때문에 세계 모든 여성들의 찬사를 받는 나라다. 두 국가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0년 성 격차 지수'에서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노르웨이는 적극적 할당제 도입으로 유명하다. 다수 정당들은 총선 후보자 공천, 당직 임명에서 여성할당제를 적용하며, 특히 노동당은 2006년부터 50%의 의원직과 당직을 여성에게 배분하고 있다. 또 2003년 기업법을 개정해 600여개 이상 공기업과 상장기업이 이사진의 4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권고했다. 이 권고는 2006년 의무사항으로 강화됐다.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법원 명령에 의한 기업해산이나 벌금형도 가능하다.
최대 경제 단체인 노르웨이경제인연합회는 각 기업이 추천한 우수 여성 중견사원에게 약 6개월간의 경영리더십훈련을 제공한다. 실제 훈련생의 25%가 임원으로 승진하고 있다. 또한 2008년 세계 최초로 노르웨이 주요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40%를 넘어섰다.
탄탄한 보육 정책도 이 같은 리더 양성 정책을 뒷받침해 줬다. 노르웨이에서 임신한 여성이나 배우자는 최장 42주일의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으며, 임금의 80%만 받는다면 휴가를 10주일 더 얻을 수 있다.
스웨덴은 남성의 육아참여를 독려하는 각종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1974년 부모휴가제도를 도입했다. 자녀가 8세가 될 때까지 필요한 시기를 선택해 480일간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다. 95년에는 아버지의달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육아휴직 기간 480일 중 60일은 남성이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남성이 양육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적인 일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국가가 심어 주고 있는 셈이다. 2006년에는 공기업 이사진의 40%를 여성으로 꾸리도록 의무화했다.
양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유럽 국가처럼 일과 가정 양립에 관한 정책이 잘 갖춰진 국가들도 현실에서는 여성이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에만 대거 포진되는 등의 문제점이 많아 할당제를 도입하는 추세다"며 "한국은 여전히 기본 복지 정책 자체가 취약한 상태니 리더 배출을 위한 사회구조와 제도에 대해 보다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