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개시 결정은 사법사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법살인의 첫 희생자이자 진보진영의 선구자라는 죽산의 지위, 더욱이 전례 없는 대법원의 직접심리를 통한 개시결정은 향후 하급심의 재심 심리뿐 아니라 사법부 과거사 청산의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대법원은 29일 재심결정을 내리는 데까지 장고를 거듭했다. 이례적으로 전원합의체를 구성했고, 재심청구 2년2개월 만에야 결정을 내린 것만 봐도 이 사건을 두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는 죽산 사건의 특수성이 자리잡고 있다. 재심은 애초 형을 정한 원심에서 하게 돼 있어, 파기자판(破棄自判ㆍ원심을 파기하고 스스로 판결을 내림)을 한 이번 사건은 하급심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법원에 재심이 청구됐다. 이에 따라 죽산 사건은 대법원이 직접 심리하는 첫 재심사건이 됐다. 또한, 죽산은 1959년 2월 사형선고를 받은 뒤 한 차례 재심을 신청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면서 사형이 집행돼 대법원은 과거 두 번씩이나 진실을 외면한 것이 됐다. 아울러 당시 주심을 맡았던 대법관은 반발여론이 일자 이례적으로 언론을 통해 "정치적 판결이 아니다"는 입장을 밝혀 현 대법원 입장에선 재심개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선배 대법관들의 오판을 뒤집어야 하는 이중 부담이 생겼다.
죽산 사건을 두고 벌어진 검찰과의 갈등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검찰청은 죽산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한 이후 강도 높은 반대의견서를 제출했다. 재심 청구의 기반이 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증거와 무관한 역사적 주관적 가치판단에 의한 결정이며, 결론에 맞춘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하급심의 다른 재심사건에 대해서도 "엄격한 심리 없이 무비판적으로 (진실화해위) 결정을 수용했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기도 해 일선 판사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때문에 이번 사건은 법원이나 대검 입장에선 과거 하급심이 심리한 재심사건과 앞으로 진행될 재심사건의 평가와 향방을 가늠할 기준이 됐다.
대법원은 이번 결정을 통해 과거사 청산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재심개시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향후 본안 심리를 통해 최종 판단이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개시결정이 내려진 이후 유죄 부분을 재차 유죄로 인정한 전례는 없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과거사 청산을 두고 법조계에서 말들이 많았지만,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결정으로 사법부 입장에선 과거사 청산의 좋은 기회를 얻었고 어느 정도 기준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사건에서 죽산 측 변호를 맡은 최병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 회장은 "늦은 감이 있지만 결정을 환영한다"며 "여전히 과거사 청산에서는 먼 길이 남아있고, 이번 결정을 계기로 활발한 논의가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대검 관계자는 "아직 결정문을 받지 못해 추후에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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