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원자력계의 눈이 미국 워싱턴DC로 쏠렸다. 한미 양국은 2014년 3월 만료되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위한 제1차 협상에서 '파이로프로세싱'을 공동연구하기로 25일 합의했다. 지금까지 파이로프로세싱이 기존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부정적이었던 미국의 입장 변화가 기대되는 상황이다. 국내 원자력계도 파이로프로세싱 상용화를 위한 물꼬를 튼 셈이라고 반기는 분위기다.
파이로 프로세싱 vs 퓨렉스
국내 과학자들은 파이로프로세싱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reprocessing)'가 아니라 '재활용(recycling)'하는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재처리를 순수한 플루토늄을 분리해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자연상태에 없고 원자력발전으로만 얻어지는 플루토늄은 우라늄과 달리 따로 농축하지 않아도 핵분열반응을 잘 일으키기 때문에 핵무기로 전용될 수 있다.
김호동 한국원자력연구원 핵주기시스템공학기술개발부장은 "어쨌건 인위적인 공정을 거치니 원자로에서 바로 나온 사용후핵연료보다 핵무기 개발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게 미국의 우려"라며 "하지만 파이로프로세싱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게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미국 과학계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로(pyro)'는 그리스어로 불이나 높은 온도를 뜻한다. 파이로프로세싱 공정이 500∼650도에 이르는 고온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사용후핵연료에 전기를 걸면 우라늄을 비롯한 여러 방사성물질이 녹아 나온다. 용해된 우라늄의 약 70%는 음극에 달라붙는다. 남은 용액에 액체 카드뮴을 넣고 다시 전기를 흘려주면 나머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포함한 여러 성분들이 모두 카드뮴과 한 덩어리가 된다. 음극에 달라붙은 우라늄과 카드뮴에 붙은 우라늄, 플루토늄은 원자력발전에 다시 활용할 수 있다. 이게 파이로프로세싱이다.
애초부터 재처리 기술로 알려진 공정은 '퓨렉스'다. 사용후핵연료를 질산과 함께 수용액 상태로 녹인 다음 유기용매를 넣어 저어둔다. 그러면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유기용매에, 나머지 성분은 수용액으로 들어간다. 이 유기용매 용액을 분리해 다시 물을 섞으면 이번엔 우라늄은 유기용매에, 플루토늄은 수용액에 남는다. 순수한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얻어지는 것이다. 러시아와 인도 중국에 있는 퓨렉스는 군사시설로 알려져 있다. 상용 퓨렉스가 가동 중인 나라는 프랑스다. 연간 사용후핵연료 800톤을 재처리할 수 있다. 일본에도 비슷한 규모의 퓨렉스 시설이 완공돼 최종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건식 재처리 vs 습식 재처리
미국은 최근 파이로프로세싱을 건식 재처리, 퓨렉스를 습식 재처리 기술로 분류하고 있다. 퓨렉스는 물을 이용하지만 파이로프로세싱은 물 대신 소금과 비슷한 물질(리튬클로라이드)을 고온에서 녹인 액체(전액)를 쓰기 때문이다. 전액은 물에 비해 열과 방사선에 강하다. 퓨렉스로 재처리하려면 사용후핵연료를 10년 이상 식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에선 2∼3년만 식히면 된다. 뜨겁고 방사선도 많이 나오는 상태에서 재처리하기 때문에 파이로프로세싱은 외부에서 쉽게 접촉하기 어렵다.
파이로프로세싱이나 퓨렉스 시설을 소듐(나트륨)냉각고속로(SFR)와 연결하면 공정을 거쳐 나온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계속해서 연료로 쓸 수 있다. 파이로프로세싱 공정에서 음극에 달라붙은 우라늄이나 카드뮴에 붙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SFR에 원료로 넣고 여기서 핵분열반응을 일으켜 전기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4세대 원자로라고 불리는 SFR은 원자로 내부를 식히는 냉각재로 물 대신 소듐을 쓴다. 소듐은 물보다 열전도도가 높고 중성자를 덜 흡수한다. 원자력발전은 핵분열반응에서 나온 중성자가 다시 주변 핵연료와 부딪혀 계속해서 핵분열반응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 냉각재가 중성자를 덜 흡수할수록 효율이 높다. 이한수 한국원자력연구원 핵주기공정기술개발부장은 "파이로프로세싱과 SFR을 연계하면 기존 원자로(경수로)보다 폐기물 부피가 20분의 1로 줄지만, 퓨렉스는 SFR과 연계해도 최종 폐기물 부피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실험실 기술 vs 세계 첫 상용화
학계 한편에는 아직 기술적, 경제적으로 상용화 가능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파이로프로세싱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건 섣부르다는 시각도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에서 얻은 핵연료를 쓰려면 SFR을 여러 기 지어야 하는 데다 SFR에서 나오는 최종 폐기물 관리방안도 마련돼야 한다는 것.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일본 프랑스 러시아 인도 중국 등도 파이로프로세싱을 연구해왔지만 아직 상용화에 접근하지 못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모의연료를 이용해 파이로프로세싱을 테스트하는 부분실증시설(PRIDE)과 종합실증시설(KAPF)을 각각 2011년 말과 2025년까지 짓는다는 계획이다. 이미 건설 중인 PRIDE는 예정대로 완공되면 세계 첫 파이로프로세싱 실증시설이 된다.
현재 국내 원자력발전소에는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사용후핵연료가 1만톤 넘게 저장돼 있다. 2016년이면 저장공간이 꽉 찰 거란 예측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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