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한다. 아니나 다를까 딸의 결혼식을 코앞에 둔 초로의 뉴요커 하비 역할이다(호프만의 나이는 73세다). 광고음악을 업으로 하는 하비의 삶은 잿빛으로 가득하다. 하비의 상사와 광고주들은 나이든 그의 업무 능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전 부인은 그렇다 해도 딸마저도 그의 편이 아니다. 딸은 결혼식을 런던에서 올리고 신부 동반 입장도 새 아버지에게 맡긴다. 사회에서도, 가족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은발의 이 남자는 뉴욕행 비행기를 놓치면서 직장까지 잃게 된다.
하비에 비하면 그나마 청춘이라 할 수 있겠지만 케이트(엠마 톰슨)의 삶도 장밋빛과는 거리가 멀다. 중학생 부모는 족히 되었을 나이에 미혼인 그(톰슨은 51세다)의 일상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남자를 소개 받는 것조차 이젠 쑥스러운 그에게 사랑은 사전 속 단어일뿐이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뉴욕 남자 하비와 런던 여자 케이트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사랑의 인연을 그린다. 제 법대로의 까칠한 성격인 하비와 수줍음 타는 케이트의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 은근한 온기를 전한다.
이야기는 좀 심심하다. 주변으로부터 외면 받는 한 남자와, 새로운 인연을 맺기 두려워하는 한 여자의 만남은 새삼스럽지 않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연령 때문인지 스크린에선 사랑의 격정이 풍기진 않는다. 두 사람의 윤기 잃은 피부도 사랑의 설렘과 발랄함을 전해주기엔 무리다.
밍밍한 이야기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두 배우의 연륜이다. 두 사람의 주름 파인 얼굴에 새겨지는 따스한 미소는 나이 들어서도 여전한 사랑의 힘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두 사람이 펼치는 은빛 로맨스는 스산한 바람과 따사로운 볕이 어우러져 낭만을 부추기는 가을과도 같다. 쓸쓸하면서도 아늑하다. 숱한 호연으로 20세기 스크린을 수놓았던 배우들답다. 톰슨이 호프만의 출연을 추천한 뒤 섭외까지 했고, 호프만은 낮은 출연료에도 불구하고 이틀 만에 출연 승낙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옳은 선택을 했다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영화 후반부 하비는 스스로에게 외친다. “하비, 이건 마지막 기회야.” 젊은 시절 사랑을 놓쳐 가슴을 치는 중년들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공명할 대사다. 하비와 나란히 걷던 케이트가 굽 높은 구두를 벗어 하비와 키를 맞추는 장면은 동공에 오래도록 남는다.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양보하며 인생 2막을 열 두 사람의 앞날을 함축하는 장면이다. 감독 조엘 홉킨스. 2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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