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지난 70여 년 동안 우리나라 모습은 참으로 크게 변했다. 나라도 찾고, 모진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나는 초등학교까지 일본 식민 치하에서 자랐다. 2차대전이 끝나 나라를 찾았지만 그 때만 해도 해외에서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 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당시 우리는 미국 원조물자로 먹고 살았다. 1950년대만 해도 국가재정수입의 6~7할이 미국원조물자를 팔아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고도 봄이 되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신문의 단골메뉴였다. 요즘 아프리카내전과 난민에 대한 사진을 볼 때마다 그것이 반세기 전의 우리모습이었음을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세계 20대국(G20)의 한 멤버가 되었고, 올 해 11월에는 G20 정상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리게 되었다. 우리가 만든 첨단제품들이 온 세계를 누비고 있다. 내가 1960년대에 미국에 갔을 때만 해도 미국 시장에서 한국제품이라고는 싸구려 코너에 섬유제품과 가발제품 몇 가지가 고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금석지감이 있다.
나 개인의 변화는 이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전쟁과 혼란, 그리고 빈곤 속에서 자랐다. 집에서 목화농사를 지어 어머니가 길쌈을 해서 만든 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중ㆍ고교를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생 끝에 18평짜리 내 집을 마련했을 때만 해도 방 하나는 전세를 내주고 일곱 식구가 살았다. 이를 생각하면 지금 나의 위치는 상전벽해라 할 만한 것이다. 내가 시조 혁거세로부터 66세손인데 그 가운데 내 세대가 아마 가장 큰 변혁을 이룩한 세대일 것이다.
나는 대학과 정부와 한국은행에서 교수와 공직자로 한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내놓을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의 한평생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성취를 얻었고, 나의 능력에 비해서도 과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것을 이겨 넘을 때마다 새로운 기회가 열렸던 것이니 내게는 운도 따라주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는 한 평생 몇 번의 큰 갈림길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내 경우에도 그러했다. 경제학공부를 위해 사관학교를 포기하고 재수하여 서울대에 들어간 일, 한은 조사부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기 위해 시중은행 입행을 포기하고 모험했던 일, 미국유학의 기회를 얻은 일, 한은을 그만두고 대학교수로 전직했던 일, 여러 차례의 정계입문을 끝까지 거절했던 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게 된 일 등이 그 사례다. 그 갈림길에서 나는 대체로 바른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나고 보니 당장의 이해보다는 멀리 보고 산다는 것, 쉬운 길보다 어려워도 바른 길을 간다는 것, 그리고 나만의 이익보다 전체 사회이익을 배려한다는 것이 한 평생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랄 때는 모든 사람이 비슷해 보이지만 성장하면서 점점 차별화 되는 것은 주로 그러한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이념성향은 학창시절만 해도 진보적이었으나 지금은 진보와 보수 사이의 중도성향이라고 생각한다. 시장경제 부문에서는 개방경쟁의 확고한 시장주의자라는 점에서 보수적이라 하겠지만 공공재부문에서는 시장원리보다 사회공익을 중시하고 남북한 관계에서는 화해 협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나는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또래 사람들을 만나면 진보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지금까지 다섯 번 사는 곳을 옮겼다. 내가 태어난 김제 농촌마을에서 1963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으로 옮겼으며 1967년에는 은평구 응암동에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해 7년간을 살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여기서 낳아 길러 이곳이 지금 나의 본적지이다. 1974년에는 은평구 역촌동으로 옮겨 8년간을 살았으며 1982년에는 은평구 갈현동 316-7로 이사하여 26년간을 살았는데 나의 사회적 성장과 가정적 번영이 모두 여기서 이루어졌다. 나이 들면서 단독주택의 관리가 힘들어 2008년에 지금 살고 있는 종로구 평창동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2남 3녀 5남매에 11명의 손 자녀를 두고 있어 직계가족이 23명에 이른다. 내가 3대 독자에 양가일손의 손 귀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이렇게 자손들이 많아 우리가문에는 큰 기쁨이 되었다.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로 있는 장남 진(進)과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는 막내 준(浚)은 모두 우리 옆에 모여 살고 있다. 세 딸 유(裕) 원(圓) 선(旋)도 매달 한두 차례는 만나고 있다. 내가 교육계에 오래 몸담아서인지 우리 직계가족에는 나와 두 아들 그리고 세 사위 등 6명이 박사학위를 얻어 대부분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모두 모여 놓으면 소란스럽지만 자라나는 손 자녀들이 떠들며 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우리 내외 기쁜 일과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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