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회의 마지막 날인 23일 오후. 미디어센터가 차려진 경주현대호텔에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온 것 같다"는 얘기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국내 대표단의 표정도 상기됐다. 몇 시간 뒤인 오후 5시. 어쩌면 훗날 세계 역사가 '경주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할 수도 있는 코뮤니케(공동 선언문)가 발표됐다. ▦시장 결정적인(market determined) 환율제도로 이행하고 ▦경상수지를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예시적인(indicative)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국제통화기금(IMF) 지분 6%포인트 이상을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중국 등 신흥국으로 넘기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하나 하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환율 전쟁은 이것으로 종식될 것"이라고 했고,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한국의 날이자 IMF의 날"이라며 흥분했다. 종전(終戰)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휴전(休戰) 선언으로는 볼 수 있다.
이번 회의는 마주 보고 달리던 두 열차 미국과 중국이 서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겠다고 호언하는 벼랑 끝 상황에서 열렸다. 11월 G20 정상회의의 성패를 가늠할 더 없이 중요한 회의. 사실 기대감보다는 회의감이 더 많았다. 물밑 협상을 통해 타협점이 모색될지언정 공개된 회의에서 선언적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내기엔 중국 측에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는 이유였지만, 반전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런 강력한 수준의 '경주 선언'에 합의한 것일까.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어떤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것일까. 정부 고위 관계자는 "겉으로는 두 나라가 얼굴을 붉히며 으르렁댔지만, 물밑에서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양자 접촉을 통해 절충점을 모색해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경주 회의 참석 이전 이미 적잖은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얘기다. 신현송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은 "국제사회에서 경제 규모에 걸맞은 지위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꼭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환율이나 경상수지 등을 억제할 수 있는 구체적 수단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국이 실리 면에서 크게 손해보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수 있다.
의장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역할도 빛을 발했다. 미국 측에 경상수지 목표제를 도입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도, 회의 일정을 바꿔 가면서 환율 문제를 집중 토론한 것도 의장국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번 선언의 구속력이 미흡하다는 점에서 '환율 전쟁'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우려도 팽배한 상황. 3주 뒤로 다가온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경주 선언'의 실천력을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도출해 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게 됐다.
경주=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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