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간 앞으로 우리사회에서 모든 일이 의혹으로 남을 판이다. 이번 황장엽 씨의 사인을 놓고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는다. 수사당국의 공식 발표는 심장질환에 의한 자연사다. 일부 네티즌들만도 아니다. 정규매체에서도 당국의 사인발표 기사에 '앞 뒤 안 맞는 부검결과' '자연사 맞나?' 따위의 제목을 붙이고 줄줄이 의혹의 꼬리표를 단다. 뭐든 일단 걸고 보는 일이 거의 사회적 습관처럼 굳어져간다. 상투적 의혹 제기는 긴 후유증을 남긴다. 심리학적으로 본래 인간은 부정적 메시지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이므로.
■ 황씨 사망 날이 마침 북한노동당 창건기념일이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정부가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려는 차에 황씨 존재가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라는 식의 정황적 의혹 제기는 너무 뻔해 소설 플롯으로도 미달이다. 하지만 정수리의 피하출혈(멍)과 욕조물의 온도를 지목해 문제 삼은 것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인다. 황씨의 수강생이 마사지를 해주면서 이마를 눌러준 흔적이라곤 하나 그 정도의 압력으로는 멍이 생길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 18시간이나 지난 뒤에도 목욕물이 여전히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설명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법의학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다. 피하출혈은 충격 시 모세혈관이 터져 피가 인체조직으로 흘러드는 현상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뜻밖의 작은 외부압력으로도 출혈은 충분히 일어난다. 제 몸에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멍을 발견한 경험은 다들 있다. 더욱이 연로해 모든 신체조직이 약해진 경우에는 훨씬 쉽게 피하출혈이 발생한다. 실내기온의 영향을 받는 욕조물의 온도도 그렇다. 발견 당시 따뜻했다는 표현은 미지근했다는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평생 각자 수천의 시신을 다루는 국과수 법의학자들이 자신 있게 내린 결론이다.
■ 의혹의 구조는 동일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황씨의 고령과 극도로 쇠한 기력, 부정맥 등 압도적인 자연사 요소들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평소 주변의 쇠약한 노인들의 죽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텐데도. 아마추어적 상상력과 추론에는 솔깃해하면서도, 막상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식견은 배척하려 드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 이번엔 다만 사안의 성격상 파장도 적고, 보수층이 주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문제는 언제나 답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혹 제기 자체가 목적인 경우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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