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내의 국립고궁박물관 북쪽 뜰에 화강암으로 만든 독특한 부도 1기가 있다. 이 부도가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려 때 국사였던 지광스님이 죽어 화장한 후 나온 사리(舍利)를 봉안한 부도(浮屠)이다.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것이 석탑인 반면 승님들의 사리를 봉안하는 것을 부도라고 하여 명칭에 차이를 두고 있다.
이 현묘탑은 원래 강원 원주시 부롬면 법천리의 고려시대 번성했던 법천사에 있던 부도이다. 법천사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찰의 기능을 잃고 난 후 폐허가 되었고 민가가 들어서면서 절터는 날로 훼손되어 갔다.
현묘탑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해체해서 일본 오사카(大阪)로 가져갔다가 1915년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원래의 위치로 가지 못하고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부근에 세워졌다. 부도가 돌아온 그 해에 건춘문 가까이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 탑은 박물관 경내에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50년 일어난 6. 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윗부분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이 경복궁 경내를 산책하다 이를 보고 복원 지시를 했고 1957년 국립박물관 임천씨의 주도로 지금의 위치에 복원해 놓았다. 복원된 탑을 유심히 보면 시멘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법천사 터에 남아있는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지광국사는 원주지방 제1의 토착성인 원(元)씨로 본관이 원주이며 고려 성종 3년(984년)에 태어났다. 유년기에 법천사 관웅(寬雄)스님에게 불경을 배웠고 고려 수도인 개경(현 개성)의 해안사(海安寺) 큰스님인 준광(俊光)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 후 문종 때 승려 최고 영예인 임금의 스승인 왕사(王師)와 나라의 스승인 국사(國師)까지 지냈다. 그는 87세로 문종 24년(1070년) 법천사에서 타계했다. 법호는 해린(海鱗)이고 시호(諡號)는 문종이 직접 내린 지광(智光)이다.
탑비가 건립되는 때는 사후 15년 후인 1085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현묘탑의 건립연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타계한 해에 마련된 것인지 아니면 탑비와 함께 마련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을 위해 이 탑을 해체할 당시에 분명히 지광국사와 관계되는 사리장치가 있었음이 분명한데 어디로 증발되었는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일이다.
6.1m 높이의 이 부도탑은 고려시대 일반적인 부도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고려시대 부도는 대부분 몸통이 8각인데 비해 4각이며 몸체에 조각된 불상과 보살을 비롯 봉황 등의 조각을 보면 화려한 가마를 돌로써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어 지광국사의 당시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이 현묘탑 역시 옮길 예정이었지만 자칫 파손이 심하게 되면 옮기지 않음만 못하기 때문에 일단 포기함으로써 지금의 자리에 홀로 남아있게 되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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