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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금융실명제의 적은 누구인가

입력
2010.10.1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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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라응찬 신한금융 회장, 이호준 태광그룹 회장…. 최근 언론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인사들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름만 보고도 알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아직 감이 오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공통 분모를 가진 유명인들을 더 열거해 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대근 전 농협 회장,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 이쯤 되면 "아"하며 무릎을 칠 이들이 많을 것이다. 모두 현 정부 출범 이후 검찰ㆍ경찰의 수사를 받았거나 수사 대상이 된 이들이다. 이들을 한 부류로 묶은 교집합은 다름 아닌 차명(借名)계좌다.

차명계좌 선호하는 자산가들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도입됐다. 이 제도로 정확한 금융소득 파악이 가능해져 납세자간 과세 형평성이 높아졌다. 또 '검은 돈'을 매개로 한 음성적 자금거래를 차단해 종전보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줄었다. 이처럼 금융실명제 시행 17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다.

그러나 최근 금융실명제는 17년간 우리 경제와 사회에 끼친 위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키 어려울 만큼 위기에 처해 있다. 진행 중인 검찰 수사가 보여주듯 대기업은 물론 금융기관조차 금융실명제를 거추장스런 장식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기업 회장들이 잇따라 천문학적 자금을 전ㆍ현직 임직원 명의 차명계좌에 보관해 놓고 경영권 승계, 정치권 로비 등을 위해 사용하거나, 은행 최고경영자가 차명계좌를 운용하며 거액을 탈세한 사실은 금융실명제를 무력화시키는 대표적 사례다.

차명계좌는 말 그대로 남의 이름을 빌리거나 도용해서 개설한 금융계좌다. 선량한 일반인이야 굳이 남의 이름으로 된 계좌로 금융 거래를 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 기껏해야 아이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어서 얼마 안 되는 자금을 증여하거나 운용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오너 등 고액 자산가나 범죄 집단은 다르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세금 탈루를 위한 변칙 상속ㆍ증여, 비자금 조성, 불법 자금 세탁 등을 위해 차명계좌가 절실하다. 명의 대여자와의 관계가 확실하다면 이보다 더 안전한 금융자산 은폐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기관이 직접 장기 휴면 계좌 등을 활용해 이들의 자산을 운용해줄 경우 검은 돈의 실체 파악은 내부 고발이 없는 한 매우 어렵다. 대기업 계열 증권사들이 전ㆍ현직 임직원 명의 증권계좌에 오너 비자금을 예치ㆍ관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차명계좌 실소유주를 처벌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금융실명제법상 차명계좌에 대한 벌칙은 적발 시 해당 계좌 자산의 50%를 과징금으로 징수하는 것뿐이다. 금융기관 임직원만 실명확인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차명계좌 거래를 유도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 받는다. 명의자 몰래 계좌를 개설하면 사문서 위조 등 혐의로 처벌 받지만 실소유주와 명의자, 금융기관의 합의가 깨지지 않는 한, 또 그것이 상호이익이 되는 한 이들의 담합 구조가 깨질 가능성은 낮다. 한마디로 차명계좌의 만연화 현상은 차명계좌 개설ㆍ이용에 따른 처벌과 불이익이 미미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실명제 보완책 서둘러야

물론 모든 차명계좌를 찾아내 실소유주와 명의자를 일치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금융실명제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드는 행위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가다간 금융거래의 투명성 제고라는 금융실명제의 본래 취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수 있다.

차명계좌를 이용한 불법 행위들이 판치는데도 정부와 국회가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다.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자산가들은 방치한 채 선량한 국민에게만 법 준수를 강조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금융실명제의 적을 퇴치할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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