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리
젖은 책을 열 때면 입속에 물이 괸다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다 옥호은전 속 카나리아 빛 수면 위를 향유고래 한 마리 물비늘 반짝이며 유영하는, 물의 숨구멍들을 가만히 옥죄었다 놓는
젖은 책의 표지엔 몸통은 없고 날개만 있는 한 무리 새떼들 끝없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있다 비등하는 생의 목록마다 둥근 물웅덩이가 패었다 물거품들 찢긴 낱말들 쉴 새 없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아주 가느다란 속눈썹을 열고 생시까지 따라 나와 계속되는 젖은 꿈도 있다 되돌아서서 함께 울먹이는 것들, 꽃봉오리 같은 주먹을 힘차게 쥐었다 놓는 빗방울 속의 불꽃들, 마음만 먹으면 쉬 따라잡을 것 같은 황혼의 걸음걸이도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수많은 구멍들, 말줄임표들이 그 책의 잎새이다 갈피갈피 하늘을 비추는 올괴불나무 한 그루씩 꽃피어 있다 만수위(滿水位)의 낮은 물소리로, 사막의 물 담을 가죽부대가 그 책보다 오랜 그 책의 부록이라 전한다
● 제 전자책으로 들어온 외국신문사의 서평란을 보고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간을 구입했습니다. 배달되는데 1분도 안 걸리더군요.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책인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대학 시절, 제 서가가 생각났습니다. 서울로 올라올 때는 10여 권 남짓의 서가였지요. 이사를 다닐 때마다 책들이 조금씩 불어났습니다. 몇 년 뒤 정릉에서 삼청동으로 이사할 때는 작은 트럭을 몰고 온 아저씨가 서점 이사하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가 됐죠. 그 트럭의 짐칸에 책들과 앉아서 올려다보던 성북동 언덕 위의 하늘이 생각납니다. 아마 누군가 봤다면 그 표정은 책들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그런 표정이었을 겁니다. 내게는 둘도 없는 짐이자 보물이었던 그 책들의 무게가 아직도 느껴집니다. 거기에 비해 전자책은 너무 가볍군요. 짐이랄 수도 없군요. 그럼 보물일 수도 없는, 그냥 책이겠네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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