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마산시(현 창원시)를 관통하던 승용차가 구산면사무소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굽이굽이 오르막길 끝에 육지와 섬들에 포근하게 안긴 어촌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마을은 초라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수정마을 수호 STX 결사저지.'
지난 11일 결기가 느껴지는 현수막 아래 2평이 될까 말까 한 사무실에서 박석곤(57) 수정마을 주민대책위원장이 기자를 맞았다.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던 동네가 STX 때문에 엉망이 됐습니다."박 위원장은 안타깝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의 안내로 마을을 둘러봤다. 작은 도랑을 경계로 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높다란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선박의 일부로 추정되는 물체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바로 문제의 STX 조선기자재 공장 부지였다.
수정마을 앞바다는 1990년 아파트 건립을 위해 매립됐지만 10여년 동안 방치됐다. 그러던 어느날 주민들은 매립지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에 깜짝 놀랐다. "동네 어르신들이 '전쟁 때 포탄 터지는 소리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동네 주민 채막이(52ㆍ여)씨의 설명이다.
주민들은 STX중공업이 은밀히 매립지를 건설업체로부터 사들인 뒤 조선기자재 공장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장이 들어설 경우 홍합 채취가 불가능해지고 368세대 1,0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은 생존의 터전을 잃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가뜩이나 수정마을은 배후의 3면이 산인 호리병 모양으로, 공장 설립시 소음과 공해의 피해가 배가되는 지형. 주민들은 조선기자재 공장 적임지가 아니며 매립지 목적변경은 공유수면매립법상 불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옛 마산시는 2007년9월 매립지의 한시 사용을 허용해줬고, 승인 한도를 넘어선 대규모 용접, 블록 생산작업 등도 묵인했다. 주민들은 엄청난 소음과 공해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학교는 운동장을 거의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고, 유치원, 수녀원, 보건소를 비롯해 368세대 전원이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대책위를 구성해 동분서주한 결과 관청들로부터 주민 절반의 동의, 이주ㆍ보상 대책 이행 완료 등이 선결돼야 공장 건설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아냈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박 위원장은 "STX와 마산시는 보상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찬성파 주민들을 동원해 주민들을 회유했다"고 말했다.
대책위 등 반대파 주민들이 상경 시위를 위해 마을을 비운 날 주민투표를 기습 강행하고, 금품까지 뿌렸다는 게 대책위의 주장이다. 주요 피해자인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녀원의 임 오틸리아 수녀는"찬성주민에 한해 '세대당 200만원 추가'혜택이 보장된다"고 적힌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옛 마산시는 이 투표를 근거로 STX공장 유치를 확정 발표했고, 창원시와의 통합으로 권한을 잃게 된 최근까지 잇따라 STX에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최근 옛 마산시가 감정평가액 24억원 상당의 수정마을 공공부지 1만460㎡를 STX에 그냥 넘겨줬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남 지역에서 이 사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박 위원장은 기자와 동행했던 3시간여 동안 지속적으로 험악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한철곤 전 마산시장과 강덕수 STX 회장을 비판했다.
그는 "강 회장은 2년전'주민들이 반대하면 공장을 짓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등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공장 건설 비용, 물류 비용 몇 푼을 아끼기 위해 주민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사람,'상생'의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기업 회장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