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내가 좋아하는 T S 엘리엇의 시구에 그런 것이 있었다. “전차와 먼지투성이 나무들./ 하이베리가 나를 낳고 리치몬드와 큐우가/ 나를 망쳤네.” ‘Ⅲ. 불의 설교’ 편이었을 것이다. 대학교 초년생이던 나는 청바지 뒤포켓에 포켓판 엘리엇 시집을 넣고 다니며 그 구절을 외우곤 했다. “리치몬드와 큐우가/ 나를 망쳤네.” 그런데 그 리치몬드가 마포에도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내가 아침마다 술 취한 머리를 흔들며 출근하던 골목길 초입, ‘창작과비평사’를 꼭 ‘창작과비판사’라 고쳐 부르는 본서 파출소 옆에 영국식 정장 차림으로 묵직히 제과점 간판을 달고, 오븐에서 막 첫 과자를 꺼낸 듯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골목을 오르면 중풍 걸린 사내가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다 나만 보면 꼭 가래침을 뱉었다. 그것을 신호로 하루는 늘 언성 높은 싸움으로 시작해서 지끈거리는 오후로 마감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간혹 누가 전화를 하면 나는 달뜬 음성으로 거기 마포서 옆 리치몬드에서 기다리라 해놓고 부리나케 달려내려가곤 했다. 영국 제과학교를 정식으로 나와 늘 말끔한 얼굴과 위엄 있는 태도로 주문을 받던 주인. 지금도 리치몬드를 생각하면 첫사랑의 애인처럼 달콤한 군침이 돈다. 전차가 다니던 시절에 들어선 후 아직도 의젓이 버티고 선 귀밑머리 허연 리치몬드 제과점. 엘리엇의 다음 시구는 이렇게 이어진다. “리치몬드가에서 나는 무릎을 치켜올려/ 좁은 카누 바닥에 드러누웠었지.// 내 발은 무어게이트에, 내 마음은/ 나의 발밑에.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울었지. 그는 새 출발을 약속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무엇을 내 원망하려?”
● 언젠가의 밤, 어느 시인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현역 교차로를 지나 마포로로 접어들어 조금 내려가는데 갑자기 그 시인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더군요. 깨달음이라도 오신 것처럼. 무슨 일인가 했더니 거기 어딘가에 제과점이 있으니 아이가 먹게 과자를 좀 사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과점은 좋겠습니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과자를, 또 집에 있을 아이를 떠올리게도 만드니까. 그 제과점은 이제 사라진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젠 시인도 그 길을 지날 때, 소리를 지르진 않겠네요. 그러고 보면 하나둘 오래된 가게들이 길에서 사라질 때마다 우리가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는 일도 줄어들겠네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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