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봄 서울 안국동 안국역 1번 출구 앞. 지금은 사라진 옛 안국빌딩 앞 거리에 벼룩시장이 꾸려졌다. 몇 년째 옷장에만 있어 먼지가 수북이 쌓였던 헌 옷 등 온갖 종류의 중고물품 앞에 자원봉사 주부 이혜옥(55)씨가 섰다. 물건을 팔기 위해 잠시도 앉아 있을 틈 없이 뛰어다니던 그는 문득 "누가 이런 헌 물건을 돈 주고 살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손님들의 반응은 이씨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첫날 판매액만 100만원, 물품 대부분의 가격이 2,000~3,000원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이씨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성숙했구나'를 느낀 새로운 시도였다"고 회고했다.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벼룩시장은 '아름다운가게'라는 이름의 재활용 자선 매장으로 탈바꿈했다. 안국동 거리의 시장은 전국 106개의 상설 매장으로 성장했다. 올 상반기 성과는 눈에 띄게 두드러져 기부물품 660여만 점, 73억원의 매장 매출 등 지난해 33억원에 달했던 수익나눔액을 가뿐히 뛰어넘을 기세다.
그리고 그 곳 길거리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던 자원봉사자 이씨는 아름다운가게 사업을 지휘하는 상임이사가 됐다. 17일 아름다운가게의 8번째 생일을 앞두고 이 상임이사를 만났다. 그는 "아름다운가게는 앞으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다. 지켜봐 달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가 구상하는 변화의 방향은 두 가지다. 먼저 양적인 성장. "전국 지자체에 하나 이상의 매장을 만들어 보다 시민들이 가까이 매장을 이용, 쉽게 물품을 기부하고 구입할 수 있도록 현재 106곳의 매장을 250곳 가까이 늘리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익구조 개선을 통한 새로운 사업의 구상이다. 그는 "재활용 자선가게의 대표인 아름다운가게가 이제는 자체적으로 사회적 기업을 발굴 육성해 이용할 계획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재활용물품 판매를 통한 수익과 나눔의 구조가 주인 아름다운가게의 운영에 변화를 주겠다는 뜻이다.
변화에 대한 자신감의 주춧돌은 물론 시민의 성숙된 기부 문화다. 그는 "늘어나는 기부물품을 보면서, 그리고 구입한 금액이 자선활동에 쓰인다는 걸 알고 굳이 재활용품을 사러 오가는 손님들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기부 등 나눔에 있어 우리는 이제 어엿한 선진국"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상임이사는 '선진국'이라는 말 앞에 약간의 단서를 달았다. 아쉬움이자 조언인 셈인데, "주는 것만의 기쁨을 좀 더 가졌으면 한다. 내 나눔을 누가 받는지 굳이 확인하려 한다던가, 나눔의 성과를 굳이 드러내려고 하는 모습을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한편 19일 오전 아름다운가게 1호 매장 안국점에서는 이 상임이사를 포함해 가게에서 일하는 모든 자원봉사자가 기증한 물품이 한 자리에 모인다. 8주년을 맞아 '아름다운 하나 데이'라는 이름으로 준비한 조촐한 행사다. 이 상임이사는 "나눔의 기쁨을 누릴 또 한 번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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